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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칠십 찬가 (人生 七十 讚歌)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에는 가사의 문맥에 멜랑콜리아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조금은 슬픈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칠십되신 분을 최상의 노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다 보니 칠십이 넘었네요. 친구들이 카톡을 보내오는 것을 보면 대체적으로 건강에 조심하라, 아니면 나이 먹음의 쓸쓸함을 전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칠십이 넘으니 좋은 점이 있습니다. 우선 예배 때 찬송을 부르면서 작곡자와 작사자의 생존한 기간을 보고 셈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찬송가에는 그들의 출생연도와 부름 받은 연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젊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야 보이니 그들의 생애를 셈해보고, 가능성 있는 남은 기간을 계산하고 결단하게 됩니다.

또 감사한 점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경제적) 삶을 살게 하셨다면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잡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시대 물질은 편리함을 안겨주고 또한 많은 것을 누리게 만듭니다. 많은 것을 누린다 함은 세상에 깊이 천착하게 만듭니다. 그런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일은 아주 힘들게 됩니다. 오래 전에 미국을 방문했다가 교우의 대접을 받았는데 그분의 아내는 골프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회원으로 있는 골프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천당 바로 밑인 구백구십구당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대화 중에 “주님이 오십니다!” 했더니, 정색을 하면서 “안 돼요, 아직 오시면 안 됩니다”라고 하더군요. 골프를 더 친후에 오셔야 된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천당보다도 사람을 더 미치게 하는 골프에 별 관심이 없으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감사하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목회 성공의 요소 가운데 얼굴이 잘생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요한 웨슬리 자신의 얼굴이 별로(?)였다고 합니다. 고로 열등의식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 얼굴이 잘생겼다는 것은 목회의 큰 프리미엄일 수 있습니다.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Ⅵ 1492-1503)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끝이 좋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으면 현대목회에서 유익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을 보니 소아과 의사에게 미모는 수입과 직결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의사나 변호사들이 TV 패널로 많이 나오는데 하나같이 잘생겼습니다. 그러니 아름답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어느 한 구석 내놓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또한 남성의 가치는 “신언서판”이라고 하는데 저는 눌변이라서 원고 없이는 설교를 못하기에 새벽설교도 항상 원고를 작성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니 많은 부분이 공평하게 되었습니다. 잘생긴 얼굴도 주름살이 늘어나니 거기서 거기가 되었고 말 잘하는 친구를 봐도 늙으니 별 다르지 않네요. 여 집사님은 어떤 아름다운 연예인을 언급하면서 “아이고, 그 사람은 늙는 것이 얼마나 속상할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저 역시 그 아름다운 분이 하루하루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원통할까 싶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늙으니 너무나 편합니다. 얼굴이 공평하게 되니 말입니다. 늙은 분을 보고 잘생겼다 하지 않습니다. “곱게 늙었다”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이처럼 궁극적으로 공평하게 하십니다. 계절도 순환하고, 인기도 순환하고 권력도 순환합니다. 올라간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내려와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대동하고 다니던 사람도 언젠가는 혼자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하던 사람은 어느 날 병약하게 되고 말입니다. 어떤 분은 큰 은사를 받아 크게 되고 성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전혀 이름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결과일 뿐입니다. 칼뱅은 의지도, 노력도 하나님의 주신 은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은사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하나 더 감사할 것은 나이를 먹으니 죄의 유혹이 아주 적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크게 감사해야 할 일이 있네요. 저는 10대 시절, 어느 날 신앙생활 하는 선배를 만나기 위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이 마침 부흥회 중이었습니다. 예배 후에 사람들이 가지 않고 기도라는 것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흘깃거리며 사람들의 행동을 훔쳐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많은 분들의 기도가 “주여,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기도를 하면서 벽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그래서 나도 벽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주여,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따라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게 얼마동안 하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명 눈을 꼭 감았는데 빨간 불덩이가 이마를 쳤는지, 아님 이마로 들어왔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그런 사건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달려죽으셨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긴긴 1월의 겨울밤을 하얗게 밝히며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10대인데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겠습니까마는 참으로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울어도 못하네(60년 당시)” 찬송가 189장을 익혔고 계속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그리고 새벽예배를 마치고 눈이 하얗게 내린 눈길을 추운 줄도 모르고 기뻐 뛰며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벽 3시만 되면 누가 잠을 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음성은 지금도 귓전에 쟁쟁합니다. “평우야!”라고 부르시는 명료한 음성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이 무려 석달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튿날부터 새벽기도회를 나가게 되었고 칠십이 넘은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스콜라철학의 대가요, 신학자인 천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1225-1274)에게 어느 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방대한 신학대전을 집필 중에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하신 주님 앞에 벌거벗은 심정으로 서게 되자,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안다는 것, 박사라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지극히 망극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집필하던 붓을 꺾어버렸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한 것들을 안다고 주장하고 가르친데 대한 속죄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무녀리 같은 제게 성령님께서 찾아와주셨고, 연약한 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요. 그 일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또 황송합니다. 이 나이에 생각할수록 감사하기만 합니다. 저 같은 무녀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다니요? 오늘은 저를 더욱 황홀하게 하시네요.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chiesadirom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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