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The Great Joy)
성탄절을 예수님 생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께 생일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영원 전부터 계시고,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만,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을 찾아오신 그 의미가 중요할 따름이다. 그는 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는가? 한마디로, 죄와 허물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삶에,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고자 찾아오신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증거한다. 이때의 기쁨은 단순히 세상의 즐거움에 기인하는 재미(Funny)가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의 정체는 하늘로 말미암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기쁨(Joy)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재미와 같은 시시한 것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크고 위대한 기쁨(The Great Joy)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이다.
기쁘고 행복한가?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예수님이 이 슬픔 많은 땅에 큰 기쁨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고, 이미 그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그 주님을 영접한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과연 그 큰 기쁨이 저들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말 기쁘신가? 행복하세요? 행복해서 미칠 것 같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실상, 그렇게 행복해 하지 않다는 답을 한다. 그렇게 오랫동안 큰 기쁨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았으면, 기쁨과 행복이 넘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예수를 믿었다는 모태신앙, 집안 몇 대째 예수를 믿는 명문가문이라고 자랑하면서, 얼굴은 왜 그렇게 마치 집안에 우환이 있는 사람처럼 하고 사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특히나 심방을 해보면, 사막의 광야같은 이민의 삶에 짓눌린 채 행복한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예수의 능력이 이민의 삶은 넘어서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비즈니스 현장을 심방해서는 어디서 백지수표를 구해 와서 원하는 액수만큼 써 드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위로가 되지 못할 것 같은 일들에 직면한다.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에 심방 예배가 길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심방의 경우는, 자신은 믿음이 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교회는 가고 싶지 않다는 반신자(半信者)를 만났을 때이다. 받은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과거에 상처받은 이야기, 옛날에 다닌 교회와 목사님, 결국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쏟아낸다. 듣기 제일 힘든 시간이다. 결국 그분이 원망하고 욕하는 대상이 내 아버지이기에, 아버지를 욕하는 데 참고 있기가 힘 드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럴 때는 더욱 그 영혼을 생각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 버티는 것이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큰 기쁨(The Great Joy)은 고사하고 전혀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좋은 예수를 그렇게 오래 믿었다면서, 그 좋은 기쁨의 영양분들을 모두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회복이 필요하다.
1. 믿음의 회복
신자의 삶의 회복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믿음의 기본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무리 오은영 박사 같은 신출귀몰한 심리 상담자가 있다고 하여도, 신앙은 이해로 되거나 감정의 상태로 평가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믿는 것이다. 어쩌면, 믿어버리는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네가 믿을 때에 기적을 보리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노라.” 하나님은 두려워 떨만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항상 전능하신 분, 언제나 살아 역사하시는 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시다. 이 모든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은 실패도 은혜, 고난도 은총이라는 자리에 이르게 하며, 마침내 죽는 것도 내게 유익함이라는 귀한 믿음의 고백 위에서 참된 감사와 기쁨,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서 목숨을 걸고 예배 회복 운동을 하시던 세계로 교회 손현보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전 목사님,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어차피 죽을 건데.” 아주 심플하고 강력한 믿음의 능력을 느끼게 하는 말씀이었다. 그렇다. 주님 발 앞에 모든 것을 온전히 내려놓는 믿음 안에서만이, 인생은 그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의 일들 속에서도 기쁨, 감사, 행복을 회복하고 누리게 되는 것이다
2. 복음의 회복
신자가 가지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하는 것이 기쁨의 회복에 중요하다. 무조건 믿는다며, 마치 장독대에 물 떠 놓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 될 것 같은 그런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출처를 따져 봐야한다. 성경은 “큰 기쁨”과 연결해서 구체적인 “좋은 소식”을 함께 말씀하고 있다. 큰 기쁨을 받고, 누리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이 무엇인가?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복음이라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아는 만큼 크고 위대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억만 죄악 가운데 죽어 마땅한 나를 살리시고자,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 예수님을 아는 만큼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에만 “Merry Christmas”를 하고, 부활절 시즌에만 “Happy Easter” 할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두 가지 인사를 해야 할 것이다. 복음, 주님의 복음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면, 그의 삶은 복음자체의 능력(DUNAMIS)으로 인해 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3. 관점의 회복
그런데, 믿음과 복음에 대해 잘 배운 사람 중에서 질문을 던진다. 현실론이다. 신앙의 원리는 배워서 알고 있지만, 실제 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평생 동안 예수를 그렇게 믿어도, 지금 내 인생이 이렇게 우울하고 공허한데 무엇이 문제인가?를 질문한다. 말씀이 틀린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정답을 말해준다. 말씀이 틀린 게 아니고, 당신이 틀렸다는 것이다. 지금 고통당하는 자기를 중심해서 모든 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내 가정, 내 자녀, 내 비즈니스, 내 건강, 내 문제 등등, 모든 것에 지나친 자기 애(愛)를 가지고 접근하다 보니, 결국 현실론의 허무와 공허에 붙들리게 되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주님께로 급격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이 좋고, 성숙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가? 주님은 맞고 나는 틀렸음에 이르는 것이다. 어떤 신학생이 시험을 치르는 데 도저히 답을 몰라서 이렇게 썼다고 한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교수가 채점을 했다. “주님 100점, 니는 빵점”했다는 것이다. 오래된 유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신학생에게 미래가 있음을 본다. 시험의 절박함 속에서도 유머 감각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음과 뭐라도 써 넣겠다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분이라는 생각하게 된다.
현실의 문제에 봉착해서 왜 원망하고 불평하며 스스로 주안에서의 기쁨을 상실하는가? 삶의 고단한 문제들에 대해 관점을 전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틀리지 않았고, 말씀이 틀리지도 않았다.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드리지 못함으로, 그래서 현실의 고개를 넘어서지 못하는 그 연약함 때문에 기쁨과 행복도 놓치게 되는 것이다.
4. 주님의 기쁨을 구함
예수를 아는 기쁨, 예수를 믿는 즐거움의 내용이 무엇일까? 흔히, 예수님을 믿어 주었으니, 예수님이 나를 기쁘게 할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복신앙의 전형이다. 자기를 기준해서 삶의 기쁨과 행복의 원천을 찾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수님 찾아오셔서 춤을 추어주면 기뻐할까? 주님이 노래를 불러주시면 기뻐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를 믿는 기쁨은, 내가 예수님의 기쁨이 될 때, 비로소 나의 기쁨이 충만해지므로 그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반사되는 것이다.
세상의 기쁨과 주님의 기쁨, 둘 다 가질 수 없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목표 안에서만이 참되고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그 본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기쁨,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목표이셨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목표가 중요하다. 우리의 목표도 당연히 주님의 목표와 같아야 한다. 나는 과연 누구를 기쁘게 할 것인가? 오직 주님 한 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목표를 가져보라. 주께서 당신의 삶에 최고의 기쁨을 항상 허락하실 것이다.
5. 교회생활의 회복
그러면 예수 믿는 즐거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생활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바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다. 바울이 그런 일 없다고 말했지만, 주님은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생활에 기쁨, 감사, 즐거움을 회복하게 될 때, 그것이 곧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교회를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이 곧 나의 최고의 행복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생활이 힘들고, 교회가 시끄럽고 어지러우면, 삶의 그 어떤 축복도 기쁨이 되지 못한다. 너무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반응이다. 교회생활이 곧 영적생활이다. 교회생활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회복될 때, 아무리 삶의 고단한 문제에 직면하여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지나가게 될 것이다.
6. 예배의 회복
교회를 기뻐하는 길이 무엇인가? 교회를 왜 세우셨나? 인생을 지으신 목적, 구원의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즉, 예배받으시기 위하여 인생을 지으시고 저들을 죄에서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영적회복을 맛보며 아름답고 복된 교회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예배생활을 점검하고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의 기쁨과 감격이 있을 때, 교회는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은혜의 샘터다 되고, 구원의 방주가 될 것이다. 오직 주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누리면서, 참으로 하늘의 기쁨이 충만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금번 성탄 시즌을 지나며, 제대로 된 주님의 기쁨(The Great Joy)을 회복하는 행복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인생, 그 자체는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을 빼고 나면 그 가치가 없다. 그래서 짧고 유한한 인생이 주님을 못 만나면 그렇게 허무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마땅히 회개하고 생각을 바꾸어 주님 예비하시는 기쁨과 행복을 회복해야 한다. 인생, 최고의 기쁨과 행복의 비결은 매우 간단하다. “주님! 당신만이 나의 기쁨과 행복의 유일한 이유가 되십니다.” 이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기쁨과 행복이 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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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