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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교회사랑, 교회개혁 3

전남수 목사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이다. 교회의 개혁은 아프고 병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에 대한 단순한 믿음들이 필요하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이 너무 복잡해져 버렸고, 복잡해진 만큼 산을 옮길만한 단순한 믿음의 능력들을 상실해 버렸다. 이를 회복할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회복과 축복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다.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 앞에 순종하고, 말씀을 따르며, 교회를 어머니의 품과 같이 기쁘게 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의 본질은 예배이다. 오늘날 어디서나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특징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자신에게 말씀 전하는 주의 종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교회 밖에서 동냥젖(?)을 찾지만, 헌신해야 될 한 교회가 분명하지 않음으로 영적인 뜨내기 인생이 되고 만다. 교회를 복되게 세우는 개혁을 위해, 무엇보다 교회에 대해 성경 자체가 자증 하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향한 사랑의 복된 마음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구별됨을 통한 거룩 

 

교회다움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이다. 그런데 작금의 종말 시대 사상은 교회와 세상의 구별을 없게 만든다. 신자와 세상 사람 사이의 간격을 없애 버리면서 교회를 세상의 것으로 오염시켜가는 것이다. 표시 나지 않게 조금씩 거룩함의 구별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예를 들어본다면, 옛날 복음성가 표지를 보면 사람의 얼굴이나 어떤 자기 선정용으로 제작된 경우를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요즘은 겉모양만 보아서는 예수 믿는 찬양곡인지 세상 유행가 음반인지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오죽하면 안수받은 목사가 트로트 개사곡으로 찬양을 만들어 세상 옷을 입고, 그 춤을 흉내 내기까지 하지 않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신앙이 좋으면 그 내면의 신앙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말하는 것이나 옷매무세 까지도 달라져야 하는 게 정상인데, 전혀 겉으로 그 구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교회 중직의 직책을 가지고 있어도, 술병이 얹힌 잔치상을 소개하는 데 별로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목회자와 성도의 구별 또한 섬김이라는 이름으로 무너뜨리며, 예배생활에 강조되어야 마땅할 형식들을 파괴시킨다. 후에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대상으로서 목회자의 권위도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아래 짓밟아버리는 것을 본다. 영적아비의 역할을 감당하는 목회자에 대해 무시와 무례함을 드러낸다. 설교는 하나의 목회자의 의견(Just his opinion)처럼 여겨지고 자신의 삶을 담아내는 헌신과 순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은혜 지상주의에 빠져서, 여기서도 은혜, 저기서도 은혜, 은혜라고 느껴지는 자기 감동만 있으면 모든 것을 가한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교회사를 찾아볼 때, 경건주의가 왕성한 시기에 가장 성령의 은혜도 충만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경건의 능력과 모양을 잃어버린 채, 은혜의 풍성함과 부흥만을 말한다면 교회는 싸구려 복음 장사꾼의 소굴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은혜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복음의 속성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거룩의 본질을 회복

 

오래 걸려도 하나씩 둘씩 본질을 회복시켜가야 한다. 세상과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본질에서부터 세상에서 부름 받아 거듭난 존재이기에, 결코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없으며, 흉내를 낼 필요도 없다. 신앙생활을 연기로 하느냐? 진짜로 하느냐? 고민해야 한다. 연기로 하는 경우 그에게 남는 것이 없다. 

신앙은 배우고 익히며 쌓여지고 쌓여서 빛나고 영광스러워져야 하고 향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척’하는 신앙생활은 연기하듯이 그의 영혼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따름이다. 어떤 복음성가 가수는 돈을 받고 대형교회에서 솔리스트로 찬양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를 위한 예배가 되었을 뿐, 자신의 참된 예배가 되지 않음으로 인해 그는 더욱 공허하여, 마치면 교회에서 받은 그 사례를 목마른 영혼의 갈증해소를 위해 술을 사 마셨다고 한다. 예배를 연기하고 쇼 하듯하게 될 때, 인간은 더 악하게 타락하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돌짝밭 같은 교회

 

오랜 시간 유수한 교회에서 부목사 과정을 거치고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에 부임해 간 친구 목사님의 이야기다. 첫 담임 목회지에서 자신의 목회를 ‘돌짝밭 목회’라는 말로 정의했다. 교회가 가진 긴 역사만큼 교회 성도들의 삶이 옥토 밭 같고 고운 가루 같기를 소망했는데, 전혀 그렇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긴 역사의 큰 매듭 매듭마다, 대부분의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지 못할 갈등과 분열의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목회의 매일 매 순간 들을, 마치 돌짝밭에서 일일이 돌을 깨어 옥토로 갈아엎어야 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는 마른 뼈와 같은 교회에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오랜 전통이 녹아있는 교회에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이를 위해 엄청 많은 기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의 노력이 얼마나 인상 깊었는지, 그 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때 성도들에게 목회적 모멘텀을 주기 위해 간절히 권면하는 모습이 수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 교회가 이만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괜찮은 교회 같습니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서, 계속 성도들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교회를 사임하고서 개척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친구 목사가 반복해서 나에게 한 말은 한 가지였다.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시스템, 목회 기술, 행사 프로그램들이 아니라, 기초와 본질의 문제라는 것이다. 평화로울 때 전쟁을 연습하라는 말처럼, 교회가 참 좋을 때에도 꾸준히 기초와 본질의 문제를 훈련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성장과 성숙, 더 나아가 부흥의 일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기초와 본질의 문제

 

그러면 교회를 세우는 목회의 기초와 본질이 무엇인가? 예배를 통한 거룩의 회복이며, 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교회 직분 세우기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모든 목회적 사역들이 사상누각처럼 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예배가 경시되는 현상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예배가 소홀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에서 자기 소견을 자기 경험에 의존해서 쉽게 주장하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함으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므로, 스스로 하나님 백성다운 거룩함의 구별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더 나아가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한다. 목회자를 소비자를 만족케 하는 기업의 판매사원처럼 생각한다. 마치 월급 받는 고용인에 불과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아주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언제라도 청빙 광고가 나가게 되면, 수없이 많은 목회자들이 벌떼처럼 지원해 올 것이고, 언제라도 다시 자신들의 마음에 맞는 목회자를 고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교회다운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지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프도록 상처 난 교회의 모습, 영적 실패의 현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럴 때에 목회자는 결단을 하게 된다. 순교의 각오로 싸울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물러날 것인가? 어느 쪽도 쉽지는 않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과 싸울 수는 없지 않겠느냐? 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길 같은 개척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민교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렇게 놀랍지 않은 현실의 한 부분이다.

교회가 상처 나고, 성도들이 영적 실패의 현장을 걸을 때 나타나는 가장 큰 위기는 영적으로 실패하고 무너진 환경에서 나타난 위기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인 실패는 교회와 성도 개인의 삶에 피폐함이라는 열매를 맺도록 한다. 과거에도 그랬다. 영적으로 무너진 시대는 복이 없었다. 구약시대, 영적으로 거룩함의 기초를 상실한 이스라엘에 비를 주시지 않았다. 결국 가뭄이 찾아왔다. 가뭄 끝에는 흉년이 필연적이었다. 흉년이 찾아들면, 백성들은 서로 간에 강퍅해지고 마침내 전쟁이 일어나, 이웃나라의 종이 되어버렸다.

 

영적회복, 세상회복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무너진 곳에 삶의 피폐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교회와 예배가 그 본질과 기초를 회복해야 한다. 아주 쉽지가 않다. 특별히, 교회를 세워가는 길, 교회를 회복하는 길, 목회를 온전히 감당하는 일이 오늘날처럼 복잡한 예가 없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백 명의 성도를 목회하면 각자의 취향에 맞는 백 개의 교회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갑절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출석하는 지역교회와 사이버상에서 말씀을 듣는 교회까지 포함하면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되는 많은 문제들을 보고 듣게 된다. 

이러한 때에 교회를 온전히 세우며 건강한 목회를 이루어가는 길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개혁된 교회를 계속해서 개혁할 수 있을까? 먼저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한다. 지상교회의 연약함 들은 초기 교회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 전체에서 보이는 게 아니었던가? 주님이 주인 되시니 주님의 손에 맡기므로, 마음에서 모든 두려움 들을 먼저 몰아내기를 소망한다.

다음으로 우리의 할 일을 생각해야 된다.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교회의 개혁과 회복을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를 꼭 기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교회의 교회 됨에 가장 중요한 것, 세상과의 구별된 거룩 성을 사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초와 본질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영적 회복을 이루게 될 때, 나머지는 주님의 몫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주의 몸 된 교회를 붙들고, 주의 종의 종 된 위치를 잊지만 아니하여도, 상처 나고 패인 교회의 문제들 앞에서 결코 목회적 우울함이나 회의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더불어 교회의 머리 되시고 주인 되신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반드시 회복의 즐거운 날을 맛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해 주실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12.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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