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개혁의 땀방울- 무엇을 기대할까? (22)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규례와 자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TV시청과 오락을 금하고 돈을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나?” 과거 보수적 신앙을 강조하던 한국교회 성도들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배웠다. 월요일에 학기말고사를 치러야 하는 학생들, 심지어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이라도 주일 밤 자정까지는 절대로 공부할 수 없다고 알고 있었다. 또한 주일에 치르는 공무원 시험과 주산 급수시험은 아예 포기하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태도라고 여겨졌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의 교인들도 동일한 생각을 지니고 있을까? 신앙의 전통을 중시하는 일부 성도들을 제외하고, 과거 신앙의 선배들과는 다른 의견을 지닌 보수적 신앙을 지닌 성도들이 있다. 이런 생각의 변화는 70년대를 지나면서 서서히 일어났다.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는, 문화와 경제를 포함하여 사회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근대화의 영향으로 삶의 정황이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획일적인 사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사고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다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 두 번째 원인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점검하는 경건한 성도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성경을 많이 읽는 거룩한 습관을 넘어,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려는 목적으로 공부하는 성도들의 수가 늘어났다. 기독교 서점에 성경 공부를 안내하는 책들이 많이 진열되었다. 예배와 교회 성경공부에 참석해야 배울 수 있던 시대가 지난 것이다. 상황의 변화를 직감한 목회자들이 먼저 성경연구에 힘을 쏟았으며 각 교회마다 해박한 성경지식을 소유한 평신도들의 수가 많아졌다. 

70년대 사회는 강압적 규례가 많았다. 예를 들어, 정부가 풍기문란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남자는 장발 여자는 미니스커트를 단속했다. 이런 현상은 전에 비하여 자신이 결정한 삶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요구가 늘어난 것의 반증이 될 수 있다. 교회 안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신앙적으로 유익이 된다 할지라도 결국 자유를 앗아가는 규례가 지나치게 많았던 것을 깨닫게 되었고, 과연 성경이 분명하게 그런 요구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갖기 시작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남성들은 반드시 양복과 넥타이를 착용해야 하나?” “세상 음악에 맞추어 흥을 느끼며 춤을 추는 것을 금해야 하나? “술에 취하지 말라는 구절은 구약의 나실인처럼 아예 술을 입에도 대지 말라는 명령인가?”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많은 규례에 대해 질문을 갖기 시작했다. 성경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 객관성이 있는 하나의 정답을 얻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각 교회 목회자의 성향에 따라 기준이 세워지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결국 양심의 자유를 위협하는 규례들에 대한 분명한 답이 제시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게 된 것이다. 

 

율법주의 

1세기에 시작된 초대교회는 주로 회심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종교적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인 자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과 함께, 아브라함 시대의 구전들과 모세가 전하였다는 다른 율법 등을 총 망라하여 문서화 한 탈무드를 지키는 것을 신앙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왔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직후, 율법을 지키는 일과 관계하여 성도들 간에 갈등이 생겨났다. 이들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된 뒤에도, 구약의 율법사상의 틀로부터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과연 할례를 행할 것인지, 구약의 절기와 제도를 지켜야 할 것인지, 안식일의 규례를 지속해야 할 것인지 등의 문제가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려는 기본적인 태도는 동일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 것이다. 특히 규례와 의식을 중시하던 자들이 그렇지 않던 성도들을 정죄하는 편견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갈등이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율법주의는 주로 옳고 그른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린 뒤 법을 충실히 지키려는 긍정적 태도로 배경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법의 정신을 배제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세운 규례로 인해 무질서를 유발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나는 법을 지킨다!”라는 태도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해지기보다, 타인들에게 드러내 보이며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려는 오만한 태도로 인해 심각한 폐해를 보인다. 그러므로 율법주의가 하나님의 전적 은혜를 거부하는 공로주의를 낳기도 하였다.   

율법주의의 오류는 초대교회 이후 교회사 전체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초대교회가 종교의 자유를 얻은 뒤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순교자와 고백자들을 공로를 인정하고 영웅으로 평가하고 기념하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초대교회의 대표적 교부 어거스틴과 논쟁을 벌인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인하고, 본성적으로 선한 인간은 스스로 율법을 성취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의롭게 됨을 얻기 위해 성도들은 반드시 고행과 순례, 그리고 참회 등 율법적 공로를 더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16세기 종교개혁의 불꽃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반기를 든 것도 그가 로마교회의 공로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또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요구 자체는 바람직하다. 거듭난 성도들의 삶은 분명 달라야 한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 아닌, 더욱 분명한 구원에 이루기 위하여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반드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오류이다. 부패한 인간의 연약과 부족 때문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어떤 힘에 의해 강압적으로 눌리고 끌려가는 것이 아닌, 성경의 가르침의 범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특권이 주어졌다. 

 

아디아포라 

우리는 율법주의를 배제할 뿐 아니라, 성경이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규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특히 성문화 되지 않은 것들 외에도 각 교파와 교단이 지닌 신학의 정체성과 맞물려진 수많은 규정과 규례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실상 임의대로 규정된 신앙세칙과 윤리적 지침들이 성도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 형편이다. 가장 중요시해야 할 문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내용을 세부금칙에 포함시킨다는 것이다.  

교회예배에 참석하는 여성도가 손톱에 붉은색 매니큐어를 칠할 수 있는지, 의사와 간호사가 주일에 병원 근무를 할 수 있는지, 주일에 교회에 가기 위해 차에 기름을 넣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답을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얻을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15장에서 절기를 지키는 문제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이 문제들로 인해 성도 사이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가 전하는 핵심 내용은 다름 아닌 ’아디아포라(Adiaphora)‘에 관한 가르침이다. 

아디아포라는 그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닌 문제들을 지칭한다. 즉, 성경에 직접 허용하거나 금하지 않기에 함부로 선악을 규정지을 수 없는 것들을 가리킨다. 한국교회 성도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인 주초문제도 바로 ’아디아포라‘에 속한다. 보수적 정통신학자들 중에도 주초를 꺼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고 그들의 신앙에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다. 특히 율법주의적인 경향이 짙은 성도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아디아포라–이견 

16세기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마르틴 루터와 요한 칼빈은 성경을 유일한 기본원리로 삼았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버금가는 위치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개혁자들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중세교회의 전통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연관지어 ’아디아포라‘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았고, 칼빈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심에 성상 문제가 있었다. 루터는 과거 로마교회 건물에서 성상을 제거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성상 문제를 ’아디아포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칼빈은 성상은 성경의 계명을 어기는 우상이기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지난 뒤 루터파 내에서 ‘아디아포라’로 인해 논쟁이 일어났다. 루터의 제자인 멜랑히톤이 로마교회와 화평을 추구하여 구교의 의식을 ‘아디아포라’로 간주하여 수용하려하자, 보수적 신학자들이 이에 반대하여 총공세를 벌였다. 그 후에도 루터파 내에서 같은 성격의 논쟁이 있었는데, 경건주의에 영향을 받은 자들은 오페라와 카드놀이 등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반대하는 자들이 이런 행위를 ‘아디아포라’로 규정하고 허용해야 한다며 대립하였다. 

영국에 등장한 청교도들은 성경이 중심된 철저한 교회개혁을 원하였다. 피의 여왕 메리를 이어 엘리자베스 1세가 왕좌에 오른 뒤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받아들이는 영국 국교회에 속한 자들과 이에 반대하여 분리를 선호하는 청교도 사이에 커다란 갈등이 생겨났다. 그 중 하나가 세속의 권위가 교회의 일에 대해 권위를 갖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한 판단이었다. 영국 국교회에 속한 요한 위트기프트(John Whitgift, 1630-1604)는 교회의 일은 ‘아디아포라’로서 교회가 속한 정부의 간섭에 순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반대로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는 자기의 종교정책을 지지하는 자들을 주교로 임명하는 여왕의 정책에 맞서서 교회 안에 감독이란 직책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아디아포라’ 자체는 논리적이며 이치에 맞는 가르침처럼 보이나, 실상 이를 적용함에 있어서 이견을 불러오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러므로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과 사고 방법이 달라지기에 과거의 문헌을 뒤적이면서 발견한 ‘아디아포라’의 내용을 여과과정도 없이 현실에 직접 적용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말은 ‘아디아포라’를 올바르게 결정하려면 조금 더 근본적인 성경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코람데오

일부 보수 신학자 중에 ‘아디아포라’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주권적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섭리하시기에 선악이 정확이 구분되지 않은 영역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보수적 교리의 논리적 결과를 따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란 스스로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율주의가 아니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얻는 진정한 선택으로서의 자유라고 설명한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인간적인 자유를 누리며 자신이 책임을 지고 선택할 것이라고만 주장한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을 놓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신다. 우리의 판단에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들에 대하여 과연 하나님께서 침묵하실까? 그렇지 않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분명하게 세워 놓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예배시간에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침묵한다. 그러나 예배에 임하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바른 마음자세에 대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주일에 교회에 가기 위해 버스표를 구매할 수 있느냐에 대해 침묵한다. 그러나 성경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에 대해 논쟁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아디아포라’를 언급하면서 먹고 마시는 문제 자체가 보다, 성숙한 성도라면 연약한 성도들을 의식하여 그들이 신앙적으로 해를 받지 않도록 섬세한 배려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서방교회에서 ‘아디아포라’로 여겨지는 것이 한국이란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절대적인 금기사항으로 받아질 수도 있다. 과거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금기로 여겨지던 것들이 개방되고 다양해진 문화의 영향을 받아 ‘아디아포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신앙을 시작할 때 ‘아디아포라’로 간주하였던 것이 신앙이 성숙함에 따라 금기 사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주초문제를 포함하여 ‘아디아포라’를 논하기 전에 성도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영국의 청교도들이 항상 생명과 같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교훈이다. 바로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을 의식하여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의 영광을 위하는 통전적인 삶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며, 주 안에서 자유로운 양심을 지닐 때 ‘아디아포라’의 세분화된 내용들이 거침돌이 아니라 거룩한 도구가 될 것이다.  

covenantcho@yahoo.com

10.17.2020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