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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땀방울-무엇을 기대할까? (1)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청교도혁명 

혁명은 개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개혁은 특정한 부분에 한하여 점층적으로 바꾸고 고쳐가는 과정에 중점을 둔다. 이에 반하여 혁명은 근본적 변화를 위해 기존의 것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급진적 행동이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 이전 사회는 군주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통치하는 체제하에 놓여 있었다. 특권계급으로부터 지나친 의무부담을 강요당하던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적어도 그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는 기존 권력을 거부하는 반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드러낸 거부감은 개혁을 요구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한 목적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집단으로 행동했다. 그것은 기존체제를 전복시킨 후에 새로운 국가체제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물론 폭력이 정당화 되었다. 결국 혁명의 결과로 루이스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고, 프랑스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프랑스혁명’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혁명‘이라는 단어의 중심에 ‘하나님의 때와 목적’이란 종교적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근대 유럽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혁명‘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가 전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보다 앞서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혁명‘ 역시 기존의 체제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체제의 도입을 시도한 사건이다.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가 통치하던 내내 로마가톨릭교회와 청교도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었다. 영국국교회의 수장이었던 찰스 1세가 로마가톨릭교회를 옹호하는 대신 청교도는 심하게 박해하는 상황 속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의회파 군대를 앞세워서 전제군주를 대항하며 혁명을 주도했다. 그 결과 왕당파가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찰스 1세는 단 칼에 처형당했다. 이로서 영국 최초로 왕이 없는 국가 즉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찰스 1세를 대항한 ‘청교도혁명’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운동이었다. 그는 왕권신수설에 근거하여 왕은 오직 신에게만 책임을 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왕의 일을 간섭하는 것은 곧 신이 하는 일에 대해 부당하게 참견하는 행위이며, 나아가서 신성모독과 무신론적인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신하는 신성불가침인 왕권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의무만 지닐 뿐이다. 영국 국민들이 오랫동안 왕권신수설을 신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왕을 통해 일을 하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청교도들이 찰스 1세가 주장한 하나님의 통치방법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그를 혁명적으로 대항하였다는 것이다.  

 

 개혁의 열매 

‘청교도혁명‘은 다른 혁명을 불러왔다. 올리버 크롬웰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 1626-1712)이 호국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대항하던 세력이 그를 축출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던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결국 1660년, 공화정 정부가 몰락하고 왕정복고가 이뤄졌다. 왕당파는 이 사건을 ‘영광스런 혁명’이라고 부르며 자축하였다.  

이후 1688년, 영국에 또 다른 혁명이 발발했다. 큰 유혈사태 없이 명예롭게 이뤄졌다고 하여 ‘명예혁명‘이라고 불린다. 이로서 왕권신수설을 중심하여 지속되던 정치적 갈등이 종식되었다. 1689년에 작성된 권리장전으로 인해 영국에서 전제군주제가 영원히 사라지고 세계 최초로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혁명이 다른 혁명을 불러옴으로서, 혁명이 지닌 한계를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돌이켜보면 ‘청교도혁명’은 향후 근대사회와 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하였던 기름진 옥토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17세기 청교도들이 혁명을 통해 드러낸 종교적 열망에 있다. 그들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행동했던 왕의 주장이 치명적인 신성모독이며 죄악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들을 움직였던 혁명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일반 역사가들은, ‘청교도혁명’을 소개하며 혁명이 지닌 한계에 대해 논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의 혁명은 다른 혁명이 등장하면서 중단되고 결국 사라진다는 매우 상투적인 해석의 틀에 국한되어 이 시기를 반영하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관점은 이들과 다르다. 엄격한 의미에서 17세기 ‘청교도혁명’은 1000년의 어두운 역사의 길을 걸어온 중세교회를 향해 대항하여 일어난 16세기 종교개혁의 열매였다. 

 

개혁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결별을 결심하고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과거 중세교회를 총체적으로 거부하고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려는 혁명적 이상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 비쳐진 중세교회의 모습은 개혁의 대상이었다. 

중세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시작된 감독제도를 극대화시킨 결과 절대적인 교회제도로 발전시켰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 2가지 권세를 허락하셨는데, 바로 교회와 국가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 교회가 국가 위에 있다고 확신하였다. 복리에 관심을 쏟는 국가와 달리, 교회는 인간의 구원을 담당하며 섬기는 기관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중세교회는 큰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한때는 교회의 힘이 유럽을 완전히 장악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권세는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며 허락하신 영적인 능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교회는 그들이 정당화하였던 방법으로 세상을 정복할 힘을 부여받은 적이 없다. 

중세교회는 힘을 키우고 유지하기 위하여 성경의 가르침보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거침없이 수용하였다. 교회는 성도의 무리라는 가장 보편적 교회론을 거부하고 조직화된 교회를 강화시킨 것이다. 그들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교회가 군림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이론을 발전시켰다. 교황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나라의 황제와 왕 위에서 군림하였다. 

또한 외형적 조직에 교회의 본질이 있다고 확신하고 성도들이 아닌 성직단이 중심된 체제를 구축하였다. 교회 안에 이중 계급, 즉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둔 것이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의 가르침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교회론을 확립시켰다. 절대군주인 교황을 교회의 머리의 위치에 올려놓고 그 아래 성직자들도 계급 구도 안에서 철저한 상하 관계를 유지시켰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본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거듭난 영적 무리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하고 이에 근거하여 교회를 향해 개혁을 요구하였다. 교회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가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하신 영광스러운 것을 분배하는 기관임을 자처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여, 구원과 죄에 대한 용서를 베푸는 중재역할을 담당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이 성도들에게 불필요한 신앙의 의무들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빼앗는 행위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은 말씀의 참된 선포와 성례의 신실한 시행을 교회의 표지로 삼았다.  

개혁 함정에 빠진 교회...‘하나님의 뜻’ 포장 속 인간적인 혁명적 행위 순환

교회는 세상정복 힘 받은 적 없어...‘교회=성도의 무리’ 버리고 조직화 시켜

 

 

개혁의 땀방울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황과 제도를 두어 성도들의 영적 교제를 방해하였다면, 영국국교회는 왕과 로마교회의 제도가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였다. 17세기 청교도들에게는 당시 영국국교회가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들도 종교개혁자들처럼 성경의 진리에 입각하여 교회의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방법과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청교도혁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혁명’의 의미를 본질적으로 바꾼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기에,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어떤 혁명적 방법도 허용되며, 환경을 초월하여 급진적으로 밀고 나가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민중들의 혁명적 열정이 기존의 권력 구도를 깨뜨렸다.  

‘프랑스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국가들은 혁명의 불똥이 자국으로 튀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혁명적 사고가 소리 없이 널리 확산되고 지속되었다. ‘러시아혁명’을 포함한 혁명적인 사건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다. 혁명적 사고는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었다.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온갖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을 위한 소망의 도구로 세워진 교회가 도리어 복음전파의 걸림돌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아픈 현실 속에서, 오래전부터 교회가 고쳐지고 변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교회가 개혁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개혁의 방법이 어떤 것일까?

교회가 개혁의 함정에 빠져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종교적 포장 속에 숨겨진 극히 인간적인 혁명적 행위가 순환되고 있다. 세속적 힘의 논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행위를 수용하고 있다. 혁명은 잠시 성취감을 맛보게 한다. 그러나 종교성을 기초하였다하여도 인간의 지혜가 담긴 정치적이며 물리적 힘을 의지한 혁명은 함정일 뿐이다. 

시민들은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정부를 주도한 자들의 공포정치에 반감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혁명정부 주도자들과 민중운동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권력층 내부에서도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경제난과 재정난이 가중되면서 사회의 불안이 고조되었다. 결국 ‘프랑스혁명’은 혁명적 사고의 가장 밑바탕에는 극히 인간적이며 개인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으며, 대중을 충동하는 힘은 한계가 있다는 교훈과 함께 마감되었다. 

“개혁된 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혼동 속에 있는 현대교회가 관심을 지녀야 할 훌륭한 교훈이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인간적인 방법을 자리 잡게 하는 세속적 요소에 대한 깊은 반성과 회개로 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진리이며 능력임을 고백하는 날까지 개혁의 땀방울을 흘려야 한다. 

covenantcho@yahoo.com

 

01.25.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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