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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경건생활 (The Piety of John Calvin)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이윤석 목사

2. 경건을 방해하는 요인들 (2)

 

2)『의심하는 자들에게 주는 변명(1554)』

 

(1) 속칭 “니고데모씨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태도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항상 문제이다. 오늘날 풍요로운 사회에서 보수진영의 교회들이 보여주는 중요한 질환 중의 하나이다. 칼빈은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속칭, 니고데모씨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별명은 칼빈이 요한복음 연구 중에 힌트를 얻어서 붙인 것이다. 칼빈은 1536년 제네바를 방문하여 파렐의 권유에 의해 붙잡혀 있던 날 저녁에 페라리에 이는 마궤리트 법정을 방문했다. 칼빈은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종교적인 타협과 달콤한 설득력이 지닌 이 간사한 예언자들을 공격했다. 여기서 “변명”에 대한 내용만 간략하게 살펴본다.

 

(2) 칼빈의 기본주장 “니고데모 씨들‘ 비판

칼빈의 기본적인 주장은 하나님이 선택된 자의 영혼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육체의 주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공적인 예배, 정직한 생활, 가톨릭 교회의 우상숭배적인 관습에 대해 순응하기를 거부함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는 종교적인 미지근함에 대해 비평하면서 네 가지 유형의 “니고데모들”을 비판했다. 

첫 부류는 많은 복음주의적인 사제들과 주교들로서 가톨릭의 강단에서 복음적인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가톨릭의 강단에서 설교하는 모습은 그들이 개혁되지 않은 교회 안에 붙어 있는 미신덩어리들을 용납하고 있다는 인상을 청중들에게 주고 있었다.

두 번째 부류는 법정의 숙녀들과 종교를 가지고 장난하면서 달콤한 신학적인 고상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부류였다. 이들은 제네바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도시라고 입을 모아 공격했다. 이들의 종교는 신학적인 살롱(salon)의 종교였다.

세 번째 부류는 문학인들이었는데 아들은 철학에 심취했으며 교황청의 어리석은 미신을 용납했다. 그들은 상아탑 안에서 책을 읽고 명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족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신앙공동체를 조직하는 일이나, 예배드리는 일이나 기독교인으로서의 올바른 행위를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기독교와 철학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자들이다. 칼빈은 좀 더 극단적인 어투로 그들을 꾸짖는다. “만일 지구상의 모든 인문학들이 기독교인들의 열정을 얼어붙게 만들고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한다면 차라리 그 모든 인문학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편이 더 나으리라.” 

마지막 부류는 호소력이 강한 주장을 펴는 자들이다. 여기에는 상인과 평민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그들을 지도하는 목사들이나 사제들이 교리의 중요한 부분들을 그렇게 크게 문제 삼지 않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업과 평일의 생활 및 여흥거리를 방해하는 일이 없기를 원한다.

 

3)『교황권 안에 있는 신앙인이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1543)』

 

(1) 양심에 따른 예배

앞에서 언급한 두 권의 저서에서 다룬 문제는 개혁되지 않은 교회가 지배하는 고향에서 그 교회의 종교적 관습과 신앙에 따르도록 압력을 받고 있는 개혁교회 성도들이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한 것이었다. 칼빈은 생명과 재산을 잃고, 세상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고국에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외국 땅에서 거친 피난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칼빈이 택한 길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칼빈에게 법과 관습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양심에 따라 생활하고 예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제기했다. 그 논문에는 그들에게 자세한 답변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경건의 확대된 적용이기도 하였다.

 

(2)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

칼빈은 우리가 할 일에 대해서 대답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우리 자신의 이익이나 물리적인 편의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측정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두뇌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다만 하나님 자신의 섭리에 의존해야 하며, 그때 하나님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역경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기독교인의 행위를 지배하는 일반적인 원리들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선언하실 때, 우리는 그 뜻을 따르면서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주님과 주의 말씀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가 심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실 때 우리도 부끄러워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밀하게 우리 마음속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가 그분의 것임을 공공연하게 고백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있다. 어떤 사람이 신앙에 관해 요구하든 안하든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하는가? 그 같은 요청을 받은 자들은 공개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신자 하나하나가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에 따라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며, 참된 예배와 기독교교육에 참여하도록 초청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일관성 있는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자가 주님께 의무를 완수하도록 이끌어주는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 구해야 하며, 일단 구한 뒤에는 전력을 다해 완수해야 한다.“ 

 

(3) 미사 문제에 대한 칼빈의 정답

칼빈이 이 논문을 통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주된 문제는 이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 가톨릭교도들 사이에 있을 때 미사에 참석해야하는가? 그는 성상들과 성골들(기타 여러 가지 의전들)을 숭배해야 하는가? 먼저 답변해야 할 문제는 우상숭배가 무엇인가?“이다. 우상숭배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인간이 마음이나 영혼 안에서 상정된 그릇된 환상을 통해 한분 하나님의 영적인 좋은 향기를 부패시키고 왜곡시키는 경우이다. 두 번째는 인간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주거나 전이시키는 경우이다. 이런 사실은 우상숭배 문제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 본문이 칼빈의 개종의 시발점을 형성한 핵심귀절이라는 가정을 증명해준다.

 

(4) 마음과 육체까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할 의무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의무를 가지고 있는가? 은밀한 가운에 우리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한가? 칼빈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 육체로부터도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육체까지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전인 우리의 몸을 우상 앞에서 더럽히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거룩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친밀한 부르심을 뜻한다.

younsuklee@hotmail.com

 

10.0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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