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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경건생활 (The Piety of John Calvin) I. 칼빈이 생각했던 경건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이윤석 목사

4)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나타난 경건 추적 (1) 『기독교강요』에서 '경건'에 대한 내용 우리는 칼빈의 언행에 드러난 경건(pietas)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면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언급한 경건의 원리들을 살펴보자. 이 일을 위해서는 칼빈의 스트라스부르크 망명 시기 (1538-41)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칼빈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라틴어판 「기독교강요」(1559) 제3권의 6-10장 부분이다. 이 책의 초판본(1536)에서 지금 우리가 다루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해당되는 부분을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은 1539년에 출간된 라틴어 2판에서부터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장이 수록된 1554년판 사이의 모든 판본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칼빈은 이렇게 중요한 주제를 그렇게 뒤늦게 다루었던 것일까?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갔던 1538년 이전에 쓴 부분과 그 이후에 쓴 부분을 비교해 봄으로써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1536년 판 「기독교강요」그리고 1537년 1월에 출간된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관한 논문들」 그리고 1537-38년에 출간된 「제네바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살펴본 후 1539년 판 「기독교강요」(칼빈은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수록하었다)와 역시 1539년에 출간된 「찬양을 위한 시편과 노래들」그리고 1540년에 출간된 「로마서 주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더하여,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제네바로 돌아온 1541년 직후에 출간된 문헌들, 즉 1541년의 「교회예식 초안」, 1542년의 「기도의 형식」, 그리고 「기독교강요」의 세 번째 라틴어판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런 비교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교회의 사람인 칼빈이 그리스도인 개인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보다 성숙한 이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저작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하게 하고 또 교회가 가진 제의와 훈련의 기능을 온전하게 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저작들은 칼빈에게 일어난 중요한 변화들을 증언해주고 있으며, 훗날 「기독교강요」와 1559년판에 제 3, 4부로 통합되었다. 1536년 판「기독교강요」와 1537-38년에 나온 「교리문답」은 전통적인 교리문답의 형식, 즉 십계명, 사도신경, 주의 기도, 성례 등의 틀에 맞추어 쓰였다. 제네바에서는 「고백록」과 1537-38년에 쓰여진 「교리문답」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가구별, 지역별 감시체계에 막혀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 1538년에 칼빈과 파렐은 추방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인가? 1536년 5월 21일 주일, 제네바시의 일반 의회는 만장일치로 미사와 그 밖의 교황 정치적인 의식들, 악용된 형식들, 그리고 성상들과 우상들을 폐지하기로 결정했으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거룩한 복음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살기로 서약하였다. 윌리엄 파렐(William Farrel)과 칼빈은 합법적으로 안수를 받은 개신교 목사로서, 설교를 통해 시의 원로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으며 제네바시를 주님의 성찬 테이블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공동체로 변화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던 1536-37년의 공문서들은(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돌아온 이후에) 그리스도인에 대한 훈련 목적으로 보완 되었으며, 그 결과 1541-43년 사이에 교회정치 부분이 보완된 형태로 나타났다. (2)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라는 논문의 전개 1536-1538년의 실패를 칼빈이 돌이켜 보면서 쓴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39년 판 「기독교강요」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성숙에 대해서 1536년판에서보다 훨씬 더 성숙되고 완성된 이해를 보여준다. 이와 비슷하게 그 다음 판인 1543년판은 초판과 재판의 교회론을 훨씬 능가하는 교회론을 보여준다. 칼빈은 제네바에서의 처음 두해 동안,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3년 동안 마틴 부처의 보호 아래 지냈던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라는 짧은 논문이야말로 칼빈이 1536-38년에 겪었던 자신의 실패를 성찰한 후 내놓은 첫 번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신앙, 회개, 칭의, 중생, 선택, 그리고 이와 관련된 교리적인 주제들에 대한 교리문답적인 진술들은 비록 명료하게 진술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지적인 동의는 얻을 수 있지만,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인의 삶에 관한 기독론적 기초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반성이 필요한 것이다. 이 짧은 논문이 1536년 판「기독교강요」와 1537-38년의「교리문답」을 보면서 우리가 느꼈던 어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칼빈이 1559년판 「기독교강요」독자들에게 말한 것처럼「기독교강요」를 여러 판 내면서 그의 사상이 진보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는 "나는 지금과 같은 순서로 이 책이 배열되기 전에는 이 책에 대해서 결코 만족하지 못했었다”고 말했다. 또한 1537-38년에 출간된「교리문답」은 크게 보아서 그전 해에 출간된「기독교강요」의 요약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문답」에는 1539년판 「기독교강요」에서 드러날 중대한 변화들이 암시되어 있다. 5)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통한 칼빈의 계속되는 순례 여정 (1) 우리는 이 논문에서 철학자들의 글과 성경의 차이에 대한 칼빈의 깊이 있는 성찰을 볼 수 있다. 칼빈은 회심을 하면서부터 이미 그리스와 라틴 사상가들의 저서들을 도덕적인 지침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성경과 이들 문헌들의 차이점이 더욱 날카롭고 자세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문헌들은 여전히 칼빈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칼빈이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칼빈이 거부한 것은 스토아 철학의 운명관 및 열정이 결여된 '지혜자' 개념, 그리고 동정심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회심 이전에도, 그의 「세네카 관용론 주석」에서도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 이 같은 태도를 보인 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나 신을 따르라는 스토아주의자들의 요구와 인간이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다는 그들의 주장, 또한 중용과 검약을 외치는 그들의 설교는 칼빈이 생각한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너무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내용들은 칼빈의 도덕적 가르침의 일부분으로 남게 되었다. 칼빈은 1536년 자신의 첫 번째 위대한 신학적 저술 「기독교강요」 집필을 통해 헬라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인 초기 교회의 교부들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 바실리우스나 크리소스톰의 설교들, 또는 키프리아누스나 암브로시우스의 저술들은 칼빈의 목회 지식에 있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다. 교부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칼빈으로 하여금 바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younsuklee@hotmail.com 08.2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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