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존 오웬과 그의 작품
청교도 시대의 신학과 신앙을 탐구하는 많은 이들이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을 가리켜 ‘최후의 청교도 신학자’로, 종교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를 방대하게 내놓은 저술가로 평가하고 있다. 영국 신학자들의 황태자, '칼빈에 버금가는 학식을 가진 천재' 그에 대한 화려한 수식어가 말하듯 그는 청교도들을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2세에 옥스퍼드의 퀸스 칼리지에 진학해서 고전, 수학, 철학, 신학, 히브리어 등을 수학했다. 오웬은 십대 때 하루 18시간에서 20시간을 공부했다. 26세 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41년 동안 8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모든 저술들은 주옥과도 같이 귀한 고전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지금까지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 그는 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신실한 목회자요 은사를 받은 대설교자로, 옥스퍼드 그리스도 교회의 감독이며,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그리고 크롬웰 경의 군목으로, 한 세대에 걸쳐 가장 많은 신학적 저작을 낸 저자이며, 어디서나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린 인격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많은 고전에 통달하고 헬라어와 라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히브리어와 랍비들에 대한 지식에도 깊이 몰입하며 천재성에 있어서 널리 인정받은 인물이다.
존 오웬의 작품에 대해 필자가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그의 저술을 중심으로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1) 1643년 오웬은 예정교리, 원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속죄의 범위, 구원에 있어서 인간 의지의 역할 등에 대해서 검토하며 알미니우스주의 자들을 논박하는 고전적인 칼빈주의에 대한 강력한 해설을 담은 [알미니우스를 드러냄]이란 책을 출판함으로 그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2) 그는 교구민들에게 교리문답을 교육 시키는 일에 탁월했으며 교리문답 책자를 어린아이와 성인들을 위해 한 권 씩 총 두 권을 저술하기도 했다.
3) 1640년대 설교와 저작들을 통해서 그의 명성은 급격히 퍼져 나갔으며 30대 초반에 이미 천 명이 넘는 성도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 왔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 앞에서 히브리서 12장 27절을 설교하여 큰 감명을 주었고 그로 인해 궁정 목사로 또한 영국 의회가 인정한 설교자로 의회에서 설교하기도 하였다.
4) 오웬은 일찍이 당대의 소장 학자로서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논쟁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1642년 [알미니안주의의 해부](The Display of Arminianism)을 작성하여 런던에서 다음 해에 출간하여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을 세우고 알미니안 주의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주력하였다.
5) 오웬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1646년 의회에서 설교하게 되면서 부터다. 이날 오웬은 자신의 회중 교회 적인 의지를 강하게 선포하였다. 오웬의 이날 설교는 이미 자신의 교회정치관을 잘 드러낸 저술 [교회정치에 대한 사상들](Thoughts on Church Government)속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1646년까지 에섹지방의 포드햄에서 살면서 결혼도 하고, 후에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에섹지방의 코게샬 장로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지만 회중교회를 개척하였다. 코게샬 (Coggeshall)에서 회중교회 목회를 하던 1648년 오웬은 백스터(Richard Baxter)와 논쟁을 하게 되는 데, 그의 저술이 상당히 반율법주의 경향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아주 흔하게 벌어지던 논쟁이 바로 반율법주의 논쟁이다. 오웬은 ‘구원은 거룩한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다’(salus electorum, sanguis Jesu)를 발표하였다.
6) 1648년 챨스 1세 국왕이 의회파에 의해서 살인자요, 폭군이라는 선고를 받고 처형된 바로 그다음 날, 의회에서 설교자로 초빙을 받아 매우 인상 깊은 설교로 감동을 주었다. 예레미야 15장 19-20절을 본문으로 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해서 격려를 받는 의로운 열정” (Righteous Zeal Encouraged by Divine Protection)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는 특히 종교의 잘못이나 실수는 사회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한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세상의 권세와 국가의 권력이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여서는 안된다는 신념이 담겨있다. 물론 세상을 어지럽히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세속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그리스도의 교회’ (Christ's church) 교수회장으로 선임된 오웬의 탁월한 행정력은 눈부신 업적을 남겨놓았으니,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대학을 맡기고 경건과 신앙심의 고취는 물론, 일반 교육수준을 크게 높이는 등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많은 설교와 저술을 발표하였다. 그는 종교 자유와 관용을 강조하였다. 유대인들을 다루는 일에 관한 회의에도 참가하였고, 신학적으로는 삼위일체를 왜곡한 쏘씨니언주의자(Socinianism)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론이 만족설을 약화시키는 입장에 서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배척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7)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의 시절에, 그는 이 시절에 [성도의 견인], [그리스도의 대속], [죄 죽임], [삼위일체와의 교제], [분리], [유혹]. [성경의 권위]에 대한 주요 작품들을 포함한 수많은 저서들을 출판했다.
8) 오웬은 크롬웰이 왕이 되려고 한 것을 반대한 것으로 호국경 시절 말기의 크롬웰로부터 호의를 잃게 된다. 1665년 그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 집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고 피신하는 동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시편 130편 강해] 그리고 방대한 [히브리서 주석] 의 첫 권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9) 1674년 오웬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전이 될 [성령론]을 출판했고 2년 후 아내와 사별하고 18개월후 미망인 도러시와 재혼하였다. 오웬은 말년에 천식과 담석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고 이 질병들로 인해 설교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저술에 매달려 [칭의] 와 [영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묵상] 등의 주요 작품들을 쏟아 내기도 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혼신의 노력을 다해 지성적으로 헌신하였는가! 그는 자신이 죽기 하루 전날인 1683년 8월 23일 그의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에 썼다. "나는 이제 내 영혼이 사랑했던 분, 아니 오히려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신 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 위안의 전부였습니다. 나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교회라는 배를 남겨두고 떠납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선장이 그 배에 계신다면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가련한 사람 하나가 없어진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깨어서 기도하며 소망으로 참고 기다리며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지금도 견고히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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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