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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개혁신앙 목회자(The Reformed Pastor)” (8)

이윤석 목사

4. 우리가 교회의 연합과 평화를 평가절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체 교회의 연합과 평화를 멸시하는 죄에 빠져 있다. 교회 일치를 위해 열심히 뛰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교황주의자들은 오랫동안 가톨릭교회(보편교회)란 이름을 오용해왔다. 종교를 분열의 도구로 삼는 것이 기독교 세계 전역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는 고약한 죄이다. 교회 전체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만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문제이다. 

연약하고 병든 부분이라도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고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그들과의 교제도 만약 긴급히 필요한 상왕이라면 합법적 범위 안에서 행해야 한다. 우리를 소원하게 만드는 이유는 대개 교회정치의 올바른 형식과 절차에 관한 사소한 것들이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화평은 경건의 확실한 친구이다. 경건은 언제나 화평과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오류와 이단은 불화에 의해 자라나고 또 불화는 이단에 의해 생기고 성장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살아야 한다. 한 마음과 한 영혼과 한 입술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믿음과 경건을 북돋우고 죄를 경고하며 장래 영광에 대한 소망을 함께 누리며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그의 말씀이 나의 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의 일은 나의 사업이요 인간 영혼을 살리는 그 일은 나의 목적이다.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간절히 권한다. 가장 필수적인 진리에 대해서만 마음을 합하자. 그리고 부수적인 문제들은 서로 용납하자. 하나님께서 주신 것 이외에 다른 복잡한 신조들은 만들지 말자. 이를 위하여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할 것을 권면한다.

 

1)성도들과 특히 전체 교회가 관련하여 논쟁을 벌여온 양분된 견해에 대해서는 어느 편에도 큰 강조를 두지 말자. 

2)자유의지와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예정 등과 같이 결국 철학적 불확실성에 빠질 수밖에 없는 무익한 논쟁들에 큰 강조를 두지 말자(필자에 입장에서, 이 부분에서 백스터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가 얼마나 신앙의 자원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또한 그는 성령의 역사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근원임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백스터의 목양 강조 일념과 연합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한 입장에서는 그를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은 교리적으로 중대한 실수를 가능케 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알미니안적 신학이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잔재라고 볼 수 있다). 

3)실체도 없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논쟁들에 큰 강조를 두지 말자. 

4)성경이 우리에게 전파된 이후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낯선 신앙관에 대해 너무 강한 주장을 하지 말자. 

5)좀 더 순수하고 분별 있던 시대의 성도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신앙관에 대해서는 큰 강조를 하지 말자. 

6)사도시대 이후 어느 한 세대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반대한 교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절대 큰 강조를 두지 말자.

 

5. 우리가 교회 규율을 적용하는 데 있어 게으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교회징계와 같은 공인된 의무를 행하는데 게을리해왔다. 만약 사람들이 여러분을 믿게 하려면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주되 다만 종이로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하고 다만 말로만 하지 말고 실천을 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귀중히 여기고 이를 헛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규례 없이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징계는 교회에서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징계를 행치 않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에 대한 배신은 아닐지라도 이에 대한 태만과 게으름인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나는 게으름 때문에 오랫동안 이 의무를 도외시해왔고, 꺼려왔다”고 고백한다. 징계는 참으로 수고스럽고 고통스런 일로서 자기부인이 없으면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이로 인해 우리에 대해 기분 나빠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이 고통을 피하는 보편적인 방법이다. 만약 우리들이 우리의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한다면 우리는 우리 선배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와 다른 불신자들 가운데서 자기의 의무를 성실히 행하다기 당했던 것과 동일한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징계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다. 또 우리가 못하겠다고 핑계 댈 만큼 어려운 것도 아니다. 

주님께서는 칼과 불로 우리의 겸손을 촉구하고 계신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고백이 아니라 죄이다. 우리가 대낮에 죄를 저질렀으면 그 죄는 숨길 수 없다. 이를 덮으려 하면 오히려 우리의 죄와 수치가 커진다. 죄를 저질렀으면 자발적인 고백과 겸손 이외에는 우리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다.

hyojungyoo2@yahoo.com

08.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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