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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소 리

움직임에는 다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 어떤 움직임보다 더 중요한 움직임이 있다. 바로 숨을 쉬기 위한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이 멎으면 더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생명체다. 물에서 건져낸 사람이거나 기절한 사람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숨소리는 살아있다는 증거가 된다.

어떤 드라마를 보니 전화를 받고도 아무 말이 없는 상대에게 하는 말이 애잔했다. “인간적으로 숨소리 한 번 내줍니다.” 말이 들리고 살아 있다는 증거를 숨소리로 알게 하라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나로 느끼게 해달라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참 야속한 요망이기도 하다. 설사 혼자 한 사랑일지라도 숨소리마저 감추는 것은 동양적 사고(思考)로는 야박할 수밖에 없다.

숨소리는 참 시사(時事)하는 바가 크다. 몸의 어딘가가 불편하여 병원에 가면 의사는 가장 먼저 청진기를 가지고 가슴과 등에 대고는 숨 쉬는 여부를 진단한다. 의사에게 있어 청진기는 그 직업의 트레이드마크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청진기의 역할이 숨을 쉬는 여부를 판단하는 기구인 것이다. 몸의 어떤 부위를 다쳤다 해도 그 몸의 상태를 진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숨을 쉬는 여부가 된다. 숨소리가 거칠거나 미약하면 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긴장했을 때도 숨소리를 죽인다. 누군가에게 쫓겨 어딘가에 숨었을 때 가장 먼저 조심하는 것은 숨소리다. 동물들의 생태를 봐도 비슷하다. 쫓기는 동물도 갖은 방법으로 자신을 감추며 숨소리를 죽이지만 사냥을 하기 위해 접근하는 사자나 호랑이도 상대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기척을 죽인다. 이때의 숨소리 즉 기척은 생사와도 직결이 된다. 잡혀서 먹히느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잡지 못해 먹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일본의 유명한 살수집단인 인자(忍者)들이 가장 먼저 훈련을 받는 것이 바로 이 숨소리를 죽이는 것이라고 한다. 사격(射擊)훈련에도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숨 쉬기다. 명사수가 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이 숨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려 있다. 살기 위해 절대로 등한할 수 없는 숨 쉬기는 삶의 전반을 진단하는 바로미터도 된다.

기적(奇蹟)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아주 기이한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체의 신비는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체의 신비를 밝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사람의 핏줄 길이가 지구 둘레보다 더 길다거나 거의 셀 수조차 없는 세포가 있고 분명 존재하되 어디에 있는지조차 밝혀내지 못하는 마음 혹은 생각의 영역은 수수께끼다. 성경에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이리저리 옮길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거의 알지 못하면서도 거침없이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거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스마트폰에는 매우 다양한 기능이 들어 있다. 다만 그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몸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가장 적절히 반응을 하며 몸을 움직인다. 요즘 TV에서는 ‘내 몸 사용 설명서’라는 좀 색다른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지만 그 프로그램을 본다하여 자기 몸의 신비를 풀어내지는 못한다. 본능(本能)은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감각 혹은 반응이며 이는 창조주가 넣어놓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나 물질문명의 발달로 밝혀질 것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의 영역이라는 말이다.

기적 중에는 숨소리도 포함이 된다. 호흡기관의 정상적인 활동에 의해 심장을 계속 뛰도록 하는 비결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안하시고 유지시켜 가시는 능력에 속한다.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미치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물건을 팔고 보증하거나 수리를 해주는 기간이 길어야 10년에 불과한 반면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그를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살아 있는 나의 옆에서 살아 있다는 증표가 되는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안심의 조건이 된다. 설사 그를 알지 못한다 해도 그가 사람이라는 그 자체로 안심이 된다. 지금 누구의 숨소리가 들리는가?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숨소리라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지켜줘야 할 사람의 숨소리라면 보람과 더불어 책임감을 고취할 것이다. 손을 맞잡을 사람의 숨소리라면 시작이 염려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숨소리를 영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면 그 삶은 반석과 같이 든든하고 천군만마의 호위를 받는 안위함으로 요동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알려주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 가늠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숨결을 붙잡고 계신다. 나의 콧김으로 불어내는 숨소리가 나뿐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증거다.

hanmac@cmi153.org

[정정] 지난 제1591호 9면에 게재된 “목회서신”(이재근 목사)의 제목이 “3중적 존재의 6가지 그룹”이었기에 이를 정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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