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무래도 좋은(indifferent)”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래도 좋은 영역”이 있겠는가?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지금 세상이 복잡해져서 성경에 명백히 나와 있지 않은 것이 많은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선(善)인지 악(惡)인지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웬만하면 대부분에 “가치중립”이라는 평가를 하고 그 중립 지대에 적당히 끼어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 가치 중립적인 것은 없다. “아디아포라”라는 단어와 정의(定義)를 세상에서 쓰고 있다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디아포라”의 개념과 실체는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무래도 좋다며” 살아갈 수는 없다.
이처럼 아디아포라의 영역이 없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음은 “성경의 충족성” 때문이다. 성경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라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명확히 밝혀 주는데 충족하다. (딤후 3:16-17). 예수님도 너무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 11:23)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중립지역은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아니면 다 악한 것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동에 선 또는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하신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이며 악이다.
아디아포라는 “무관심한(indifferent)”이라는 뜻도 된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이니 실상은 무관심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차라리 밉다고 하지, 무관심은 감당하기에 너무 서럽고 너무 무섭다. “무관심의 절정”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작품으로서 철학자 필리프 프티와의 대담을 싣고 있는 책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이 있다면 무관심이요, 이 땅에 가장 큰 죄악이 있다면 다름 아닌 무관심이기에 “무관심의 절정”이라는 책 제목은 이 시대를 대변하기에 매우 적절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이 시대뿐이겠는가.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깊은 탄식이 있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복음 11:17) 무엇을 해도 도무지 반응이 없는 무관심에 대한 강한 질타이시다. 그 뿌리 깊은 죄악과 질병이 오늘날 대부분 사람에게 도져서, 하나님께도 교회에도 이웃에도 이 세상에도 다음 세대에도 모조리 무관심. 오직 자기 자신의 문제를 제외한 모든 일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그야말로 도처(到處)에서 무관심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관심하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예수님의 고난도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끝없는 관심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축복과 앞으로 누릴 유업과 영생을 가져다준 것이다.
분명히 하자. 하나님 앞에서 아무래도 좋은 것은 없으니, 그리스도인들은 “아디아포라”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동경(憧憬)하지 말아야 한다. 관심 갖자. 이웃에게 무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가져서는 안 되는 태도이니 “아디아포라”를 더 이상 삶의 방식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02.1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