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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만 주옵소서”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주변에서 그런 일은 많이 없었다. 두 번씩이나 걸린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랬다. 작년 초에 covid19에 걸려 심한 고생을 했다. 그때 생사(生死)를 넘나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죽음의 문턱이 먼 것이 아님을 엿보긴 했다. 얼마 전에 오미크론이란 이름으로 코비드가 두 번째 찾아왔다. 가까이 만났던 사람 중에 오미크론 확진을 받은 사람이 있어 나도 자가 검사해 보았다. 진단 키트에 양성반응을 의미하는 두 줄이 보였다. 서둘러 격리의 자리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날 다른 소식이 들렸다. 곧 아흔이 다 되어 가시는 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것이다. 여러 정황상 필자가 집례를 해야 했다. 자녀 중에 목회자도 있고 장로님 권사님으로 각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많아 천국 환송예배에 수백 명이 장례식장에 참석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확진 판결을 가진 필자가 그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대면으로 참석을 못했어도 집례는 했다. 유가족과 모든 조문객은 장례식장을 가득히 메우며 앉아 있었고 필자는 교회에서 zoom으로 집례를 한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 날 하관예배였다.

“한 줄만 주옵소서” 하관예배가 있던 날 이른 아침 필자는 자가 검사를 하면서 기도하였다. 양성  반응을 가지고 zoom으로 드릴 수 없는 하관예배를 집례 한다는 것은 필자부터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양성반응을 가진 지 삼일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한 줄, 음성 반응을 달라는 기도는 너무 이른 기도였다.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자가 키트는 그 표시가 한 줄에서 멈추었다. 믿기지 않은 음성반응이었다. 하관예배는 당당하게(?) 집례 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가기까지 한 줄이면 충분했다. 아니, 반드시 한 줄이어야 했다. 신앙생활도 한 줄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 수많은 줄이 있다. 사람들은 이줄 저줄 여러 줄을 움켜잡는다. 여러 줄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러 줄이 오히려 그 줄을 잡은 자를 얽어매고 낭패케 한다. 우리는 다르다. 한 줄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건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과 생명의 닻줄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배에는 닻줄이 있다. 닻줄 하나에 배의 운명이 달려있다. 아무리 험한 풍파가 몰려와도 닻줄이 든든하면 배는 안전하다. 닻줄을 영어로 앵커(anchor)라고 한다. 앵커는 세상의 뉴스를 전하는 자에게 붙여졌다. 앵커가 전하는 소식에 세상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앵커의 말에 따라 평화를 누리기도 하고 흔들거리기도 한다. 앵커가 여럿이요 똑같은 사건에 말하는 내용이 각기 다르다면 세상의 혼돈은 멈출 수 없다. 전쟁과 전염병이 몰고 온 세상의 혼란은 무엇으로 멈추어질까? 여러 줄을 붙잡고 혼란의 늪에서 빠져나오려는 불쌍한 인생들 그리고 지도자들. 인류를 살릴 단 하나의 앵커, 예수님이 아니면 이 세대는 더 깊은 수렁에 잠길 것이다.

며칠 있으면 필자가 속한 교단의 총회가 시카고에서 열린다. 몇 년 만에 대면으로 열리기에 기대감과 설렘이 크다. 비슷한 기대감과 설렘을 가지고 최근에 각 교단의 모임이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수많은 교단의 최고 이슈가 무엇일까? 아무것도 시급하지 않다.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모이는 지역과 상황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함께 모여 예수님만 붙잡으면 된다. 그리고 외치는 것이다. 오늘의 인류가 맞닥뜨린 난제에 예수님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그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그 누구에게나 그 어느 시대나 유일한 구원의 한 줄이시라고.

05.0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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