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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진창현 명인 스토리

김재열 목사

미주한인예수장로회 총회장, 뉴욕센트럴교회 담임

일제 강점기에 경상도 김천이라는 시골에 살던 14살의 어린 소년이 강제 징용과 탄압을 피하여  어머니 품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16살에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요코하마 항구에서 석탄을 나르는 노동으로 중학교를 마쳤고, 미군 불도저를 따라다니면서 배운 영어실력으로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들을 상대로 낮엔 인력거꾼으로 밤에는 메이지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영어교사 자격증을 받고도 조선인이라는 신분차별로 교사가 될 수 없음에 절망으로 지내던 날 동네 골목을 지나는데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되었다. 분명한 피아노 소리가 창현의 귀에는 분명한 바이올린 소리로 들리기 시작하였다. 고국을 떠나오기 전 중학교 2학년 때에 일본인 교사로부터 처음 바이올린을 접하고 약간의 연주법을 가르침 받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때를 맞춰 대학 강당에서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듣게 되면서 자신의 미래를 바이올린 제작에 뜻을 품었다. 그 강의에서 특히 창현의 마음에 사로잡은 대목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신비의 소리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20세기 문명을 다 동원해도 그가 만든 소리를 만들어 내기는 불가능하다’는 강의를 들으면서 창현은 불가능이라는 단어에 도전하면서 용감하게 바이올린 제작에 도전장을 내걸었다. 

17세기 예술의 고장인 이태리 북부 크레모나 지역은 바이올린 명산지로 알려졌다. 이 지역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와 아마티 그리고 과르네리라는 3대 명장들이 산출되었다. 창현은 돈이 생길 때마다 악기들을 계속 사서 눈을 감고 소리음을 듣고 좋은 악기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훈련에 전념했다. 그리고 난 후에 악기를 제작하는 일을 시작해야 했지만 조선 사람에게는 제작기법을 가르쳐주는 장인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 분야엔 국적 차별이 없을 줄 알고 도전을 했는데 산 너머 더 큰 산을 만났다. 수없이 많은 장인들을 찾아 전역을 두루 다녔지만 조선인을 제자로 받아주는 장인은 아무도 없었다. 갈 곳이 없어 역전에서 며칠을 배회하던 그를 불쌍히 여겨 경찰이 임시 체류할 수 있는 움막을 내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 부근이었다고 한다. 그 지역은 바이올린 제목으로 가장 적합한 좋은 단풍나무들의 집산지였는데 기회가 있는 대로 근접한 재목들을 모아서 공장과 장인들에게 판매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창현은 어깨너머의 학습기회로 삼았다. 여름철에는 노동으로 겨울철에는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한지  20여 년이 지난 날… 자신의 작품들을 국제콩쿠르에 출품하였다. 

1976년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 제2회 국제 콩쿨에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와 세공과 음향부분 등 총 6개 분야의 작품들을 출품하였다. 펜실베이니아대학 강당에서 개최된 시상식에서 이 무명 장인은 한쪽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일본에서 도착하여 시차로 인한 피곤함과 참가에 의의를 수상까지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그는 수상식 내내 깊은 졸음에 빠져 있었다. 사회자가 바이올린 수상자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도 멀리 꿈결에 들렸다. 우레 같은 박수소리도 들었지만 수상자가 단상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똑같은 이름을 또 불렀고 여전히 수상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자는 두 번째 비올라 수상자를 호명하는데 아까 불렀던 이상한 이름과 같은 이름을 또 부르는구나… 생각하면서 계속 졸음에 빠져 있었는데… 여전히 수상자는 나타나 않았고 박수 소리만 여전했다고 한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수상자를 호명하는데 계속 처음부터 발음이 비슷한 이름을 불러서 어느 중국인 장인을 부르는 줄로 알고 여전히 창현은 졸고만 있었다. 사회자는 거듭 ‘the Winner is Mr. 챙휸 찐!’을 불렀는데 그때서야 자기 이름을 영문으로 부르는 미국식 발음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서야 뒤통수를 한 방 맞은 느낌으로 어리둥절한 채로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섰다. 서치라이트가 비치고 장내는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에 천정이 날아가는 줄로 알았다고 한다. 

총 6개 부문에서 무려 5개의 상을 휩쓸었다. 하나 받고 내려가려면 다시 돌려 세워서 또 상을 주고… 주고 무슨 상을 그렇게도 많이 받는 것인지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5개의 금상을 받았다.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이름은 진창현(1929-2012)이었다. 창현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작품에 거의 흡사한 기교를 터득한 명인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1984년에는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로부터 더 이상 이들의 작품은 검사가 필요 없다는 ‘무검증 제작자’로 부르는 세계적으로 단 5명밖에 없다는 매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았다. 창현의 수상소식이 보도되자 일본은 귀화를 수차례 권고했지만 84세로 죽는 순간까지 조선인으로 살았다. 

명장 창현은 2012년에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아이작스턴, 로스트로포비치, 엔릭 쉐일, 정경화, 강동석 등 명연주자들의 손에서 신비의 선율을 노래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고, 한국과 일본에서 많은 드라마들이 제작되었는데 일본 고등학교 2학년 영어 교과서에 장인의 일생이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포기가 없는 불가능의 도전자 진창현! 8.15 해방 기념일이 가까이 오는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삶으로 보여준 진정한 조선인 진창현의 삶에 고개를 숙인다. 

jykim47@gmail.com

08.2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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