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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안현경 (1881-1957)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안현경은 1881년에 오늘날 서울 종로구 필운동인 한양 성위동에서 태어났다. 홀아비가 된 그는 24세가 되던 1905년에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응모하여 그해 일본에서 5월 8일에 시베리아 선박을 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송지상(宋之相)으로도 썼는데 ‘현경’을 賢慶, 玄卿 또는 賢敬으로 적혔고, 영어로 An Hyen Kyeng 또는 Ahn Hyun Kyung으로 표기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안현경은 카우아이섬으로 이동하였다. 하와이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1903년 8월에 만든 미주 최초의 정치 단체인 신민회 카우아이 지회에 그가 참가하였다. 그 후 안현경은 오아후섬 와히아와로 이동하였다. 그는 1909년 4월 하와이 오아후섬의 와히아와에서 결성된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와히아와 지방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듬해 7월에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자 하와이 각 지방 대표자와 함께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와 연서로 일왕에게 일제의 대한제국 강점을 항의하는 전보문을 발송했다.

안현경은 1913년 이후 호항 한인 중앙학교 직원으로 재직하였다. 박종수 목사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인 중앙학교에 진학한 장남과 호항 중학교에 진학한 차남을 위하여 안현경이 그해 12월에 1년 학비 20달러를 후원하였고, 박 목사의 딸을 호항 한인 중앙학교에 유학시켜 한인 여자기숙사에 거주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승만이 1913년 2월에 하와이에 정착하여 그해 9월에 태평양 잡지를 발행하였을 때 안현경은 태평양잡지 간사로 재직하였다. 이듬해 4월에 포와한인교회보를 발간하였는데 편집에 홍한식이었으며, 안현경은 발행인이었다. 

1916년 11월에 이승만이 하와이 정부에 등록한 한인여학원에서 안현경이 이사로 활동하였다. 이 여학교는 1918년 9월에 한인기독학원으로 개명하고 남녀공학의 민족교육기관이 되었다. 

안현경은 1917년부터 1918년까지 2년간 대한인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총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초부터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교인 30여 명이 릴리하에 있던 여학생 기숙사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1918년 7월에 호놀룰루에서 신립교회(新立敎會)를 설립하였다. 그해 11월 16일에 국민보에 게재된 아래의 안현경의 ‘한인 교회 형편에 대하여’에서 그의 교회관을 엿보게 된다. “과거 수 삭 동안에 하와이 한인 교회가 한 부분 더 성립되는 데 관하여 일반 동포 사이에 혹은 비평도 하고, 혹은 찬성도 하여 피아간 언론이 없지 않으나 한 가지 이상한 사단은 특별히 주창한 사람이 없이 자연히 인심이 변경되어 하와이 한인 전체가 동성 상응하여 사방에서 불일 듯 됨은 이상하다 하겠지마는....누가 권세로나 법으로 압박하며 막을 수 없는 것뿐이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그러나 본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몇 가지 사건이 있으니... 한인 전체에 관계가 되는 일에 방관만 하고 앉을 수 없는 것은 또한 나의 책임이 되므로 남이 곱다고 하든지, 밉다고 하든지 불계하고 대세 만들어 몇 마디 기록함인 저.

오늘 한편에서는 말하기를 하와이에 많지 못한 우리 사람 사이에 종교 부분이 많아지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하되 ... 만약 예수교의 명예로는 몇 부분이 있을지라도 큰 관계가 되지 않을 것은 장차 그 도리를 깨달아 참뜻이 그 민족에게 가득하면 오늘 많은 부분이 하나 될 수 있고, 열부분이나 백부분으로 더 분열된다고 할지라도 그 일하는 힘은 그 민족이나 그 나라를 위하여 서로 잘하기를 경쟁할 것밖에 없을 따름이라.

장차 형편도 이상 사실과 같거니와 오늘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종교상 일을 해가려는 사상이 차차 생겨나는 것은 하와이 동포도 전일보다 모든 형편이 한층 발전되는 것은 우리 민족과 나라 생각하는 뜻으로 한족의 장래 기초를 세우고자 함인즉... 하나님 섬기는 일을 어찌 남의 힘을 바라고 지낸다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으며, 국가 장래를 희망하는 민족으로 그 백성 종교가 남의 정신과 타 인권 하에 두고 어찌 그 나라를 자기 정신으로 유지한다고 하리오.... 

근자에 형편을 보는바 새 교회가 생긴 후 하와이 한인 종교상 형편이 날로 진보되는 여러 방면이 있으니 첫째는 미이미교 목사들과 및 교회 책임자들이 부지런히 힘이 새로 나서 전도하기에 분주하여서 할 수 있는 대로 교인 얻기에 전력하며, 각 지방에 쉴 사이 없이 순행하여 교회가 없던 곳에 새 교회도 설립하며, 형제 심방에 친근하여 사랑하는 뜻이 전일보다 배승하니 이것은 참 교인 된 책임에 마땅한 일이라 할지오. 신립 교회에 형편을 말하면 전 일에 낙심되었던 교인을 새로 믿기를 권고하여 인도하며, 믿지 않는 사람이 열심히 전도도 하고, 믿던 형제들은 더욱 믿음을 세워 천국 일을 위하여 성력하고, 우리 한인 교회를 다시 부흥시킬 주지를 가지고 일하고자 할 때 우리 힘으로 우리끼리 하나님 섬기기를 목적하여 나가는 고로 사방에서 교인이 다수하게 일어나는 이때 이것만 가지고도 하와이 한인 교회는 오늘 다시 부흥하는 시간이라.

두 교회 인도자가 마땅히 한 가지 매달아 행할 바 일은 서로 주지는 다를지라도 종말에 바라는 결과는 한 목적인즉 누구든지 큰 뜻을 가지고 내 교회를 흥왕하게 하여 죽어가는 영혼을 구하는 일을 전력하고자 할 때 피아간 타 교회에 대하여 비평과 흠절을 기회 삼아 시비를 주장하거나 혹 교인들을 수단으로 유인치 말지며, 간교한 계책을 꾀하여 남의 교회 인도자를 모함하는 폐단이나, 내 교회에는 성신이 있으되 다른 교회에는 성신이 없다는 말이나, 혹 개인의 이름을 불러 아무개 교회라는 언사와 의를 팔아 개인의 이익을 도득하는 것과, 기타 여러 가지로 합당치 못한 언론을 발하면 이는 교인의 행동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기에게 불이익한 일이 생길 뿐인즉 이와 같은 일은 일절 거절하여야만 거룩한 교회의 일이라 하노라.

혹이 말하기를 신립 교회가 설립된 후 어떠한 교회에서 모인 은전 일에 미이미 교회에 대하여 자급료를 많이 내지 않던 교인이 시방은 열심히 매 명에 5달러, 10달러씩을 낸다 하니 이는 미이미 교회 인도자를 돕고자 하는 일인즉 미이미 교회에는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오. 이것을 가지고 혹이 비평하여 말하기를 내 일을 내가 내 힘으로 할 생각이 없이 저와 같이들 한다고 걱정을 하나 이것도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은 아일랜드 백성이 우리 한인보다 문명이 더 낫다는 사람으로도 자기 나라 독립을 반대하였거든 어찌 한인 가운데인들 그와 같은 일이 없기를 바라리오....

또 어떤 곳에서 모 씨가 말한 바 이 박사가 태평양 잡지에 글쓰기를 한인들이 미이미 교회 은혜를 받았고, 또 딴 교회에 부분을 세우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하며, 이 박사가 신립 교회에 한 임원이 된 것은 다른 사람에 주축을 받았다하니 이러한 변론을 다 추신할 필요가 없지마는 한 가지 생각하여 볼 것은 어떠한 때면 하와이 한인이 이 박사에 정신으로 산다하고, 또 어떤 때는 이 박사가 다른 사람에 주축을 받았다하니 그 경우를 분석하기 극란하며, 또 이 박사가 잡지에 말하기를 딴 교회 설립이 불가하였다 하였으면, 한인들은 이 박사 말만 듣고 잘 될 일이나 못 될 일이나 그 명령에 순종하라는 말인가. 설령 이 박사가 전 일에 한인이 교회를 따로 해 가는 것이 불가하다 하였을지라도 오늘 많은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가하다고는 할지언정 도리어 비평함은 불가한 것이라. 

"한인들이 자조로 교회를 세워 우리끼리 자유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일이 자기 주장하는 교회에 방해가 될까 하여 고함이라. 이처럼 하면 우리의 사랑이 한층 더 발전되어 내가 내 일을 하여야 한다는 뜻이 명백할 것인즉 이것도 한인 된 자의 한 기회라 하노라.” 

그해 12월에 신립교회는 평신도회를 열고 교회를 한인기독교회로 개명하였고, 미국 회중 교회의 모범을 따랐으나 어느 교단이나 교파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이 교회를 자유교회 또는 독립교회라고도 불렀고, 장로와 집사가 없이 평신도 중심으로 선교부장 중심의 이사원에서 교회 치리를 담당했다. 안현경은 한인기독교회 이사원의 위원으로서 전도에 힘썼고, 교회 밖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9년 삼일 독립 만세운동 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해 7월에 안현경이 원동 시찰 겸 통신원으로 임명되었고,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하와이 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11월에 이승만을 따라 안현경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및 각부 총장의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는 미주지역 대표 자격으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여 상임위원회 군무위원 및 정무조사 특별위원회 외교분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 7월에 이승만이 호놀룰루에서 동지회를 조직할 때 안현경은 민찬호, 이종관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후원했다. 이듬해 임시정부 교민 단령에 따라 대한인 국민회를 하와이 대한인 교민단으로 개편하고 총무가 되어 구미위원부를 후원했고, 기관지 국민보 주필로서 활동했다. 1923년 12월에 교민들의 금주와 금연을 장려하고자 안현경 등은 한인교풍회를 조직하였다.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제15회 연회가 1935년 1월 3일 저녁 7시에 호놀룰루 스쿨스트릿 한인기독교 예배당에서 열렸다. 박동완 목사가 30분간 기도회를 인도한 후 전년도 회장 최선주가 개회를 선언하고 각지 대표의 대표증을 조사 접수한 후 연회를 조직하였다. 회장 김형식, 부회장 정운서, 서기 박주범, 순서 위원 박동완, 규칙 위원 박동완과 김형식, 후보자 진행위원 양흥엽과 조석진, 통계표 위원 조석진, 성만찬 위원 김형식을 선정하였고, 안현경은 이은구와 함께 재정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장 붕 목사의 기도로 개회하여 이사를 호선하였다. 중앙이사국장 박동완, 서무와 서기 이종관, 선교부 부장 민찬호, 부원 박동완, 교육부 부장 김형식, 부원 최성대, 재무부 부장 정운서, 부원 이종관이었고, 안현경은 사회부 부장이었고 부원은 정운서였다. 중앙이사국 이사 9인을 매년 3인씩 개선하였는데 안현경은 민찬호와 박동완과 함께 1935년까지였고, 이승만, 이종관 그리고 최성대는 1936년까지였으며, 장 붕, 김형식 그리고 정운서는 1937년까지였다.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가 1921년 스쿨 스트릿에 첫 예배당을 마련하였다가 예배당 확장을 목적으로 1928년에 방매한 후 약 10년간 신흥국어학교 교실에서 예배를 드렸고, 1938년 4월에 릴리하 스트리트에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서울 광화문을 본뜬 예배당을 신축했다. 그해 개최한 제18회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연회에서 안현경은 재무로 선출되었고, 그해 한인기독교회 세례교인은 1,263명이었다. 한국인 자력으로 해외에서 최초로 세운 민족 교회였다는 점에서 선교 한국 역사상 특기할 만하다.

1941년 4월에 호놀룰루에서 미국 내 각 한인 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할 때 안현경이 동지회 중앙부 대표로 참석하여 민족운동전선의 통일과 독립운동을 강화했고, 그해 7월에 재무부를 확대할 때 5인 위원 중 한 명으로 포함되었다. 1943년 말 동지회가 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자 동지회 대표 김영기 등과 함께 안현경이 동지회를 떠나 국민회에 가입하였다.

안현경은 1957년에 향년 76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안현경에게 그의 독립운동의 공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유해는 1998년에 봉환되어 국립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

 

10.0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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