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롬폭 한인 장로교회
김성원은 1880년에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장관동에서 거주했다. 24세가 되던 1904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을 꿈꾸고 독신으로 하와이 노동 이민선 아메리카 마루에 승선하여 그해 10월 1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 알파벳으로 Sung Won Kim 또는 S.W. Kim으로 소개했다.
하와이에서 노동 조건을 이행한 김성원은 1906년 초에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석탄광 주선인 황사용이 1906년 3월 12일 자 신한민보에 낸 다음과 같은 광고를 읽었다: “락스프링 석탄파는 일은... 일군은 몇천명이라도 쓰기를 원하는데 숙식도 편리하고 일도 매우 좋은 고로... 한인 3, 40명이 모였으며, 매일 공간이 3달러 80센트이오, 도급을 맡아서 하면 매일 2, 3달러를 더 벌며, 이 일은 한인이 주관하는 일이오. 철도비는 삼분의 이를 감하여 주고, 돈이 없는 이는 노비를 선당하여 지급하오니 이 일을 원하는 이는 상항 공립회관의 이재수 씨를 찾아 문의하시오.” 김성원은 와이오밍 락스프링스로 이동하였다.
김성원이 락스프링스에 도착하기 한 달 전인 2월에 공립협회 락스프링스 지방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황국일, 부회장 겸 학무에 이응목, 서기 겸 사법에 유성운, 회계에 한규현, 응접에 이명구와 한성범, 경찰에 박성렬이었다. 김성원이 락스프링스에 도착한 3월에 락스프링스 지방회 조직 기념식이 있었다. 화초와 국기로 치장하고 공립협회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고, 회장이 개회한 후 서기가 각처 서신을 낭독하였다. 총회에서 화초와 작은 국기를 보냈고, 상항 지방회는 비단 족자 두 폭을 보냈으며, 리버사이드 지방회는 보조금 2달러을 보냈고, 로스앤젤레스 지방회는 축하 서신을 보냈다. 이응목이 축사를 낭독한 후 애국가 위원의 인도로 애국가를 제창한 후 연설이 있었다. 황국일은 ‘단체의 이해’라는 주제로, 이응목은 ‘제심 합력’의 대지로 연설하였다. 그리고 신입 회원을 소개하였다. 그날 새로 가입한 자는 김성원을 비롯하여 김형근, 이응순, 유홍서, 김우보, 김유성, 조화실, 남회일, 최화삼, 박병원, 송기현이었다. 대황제 폐하와 2천만 동포와 공립협회를 위하여 각각 만세 삼호를 한 후 폐회하였다. 이날 김성원은 이응두와 함께 애국가 위원으로 수고하였고, 최상묵이 수식위원으로 봉사했다.
락스프링스에 한인 동포가 모여 사는 캠프가 따로 있었다. 이 캠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인촌을 신한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석탄광 주선인이었던 황사용이 교인이었고, 얼마 후 미국 남감리교 순회 전도사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예배를 인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소위 락스프링스 한인교회다. 한인 동포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면 김성원도 예배에 참석했을 것이다.
롬폭 한인 장로교회
석탄 채굴에서 한인 동포가 중상을 당하고 생명까지 잃는 가운데 김성원은 1910년에 락스프링스를 떠났다. 김성오가 1909년 7월에 여관을 설치하고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 주선을 한 중가주 롬폭으로 이주하였다. 김성원이 롬폭으로 이주한 그해 5월에 김진하, 백군삼, 이운옥과 함께 롬폭 대한인 국민회 롬폭 지방회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그해 7월에 동명이인인 김성원이 동성동명이 있다면서 자신의 이름을 김성원에서 김성만으로 행세하오니 조량하시라는 개명 광고가 있었다.
다음 달 김성원은 한운서, 이인화, 안중권, 김성오, 임달순, 김창학, 우도영, 박운서, 김성일, 장봉석, 이능백, 강국보, 김성삼, 김만수, 김두호, 최주희, 손동선, 김수룡, 한창옥, 장덕우, 손기보, 박영화, 박동은, 김석준 등 롬폭 동포와 함께 “신한민보가 없어지면 곧 동포의 혈맥이 끊어짐이라”하고, 신한민보사에 1달러를 후원하였다. 그때 김성원은 한운서와 함께 병중에 있으면서도 후원의 손길을 뻗쳤다. 그다음 달에 롬폭 한인 노동자 손기보, 김성오, 손동선, 김창학, 정국현, 임달순, 장덕우, 한창옥, 박병원, 최주희 등 9명과 함께 두 번째로 신한민보에 1달러를 후원하였다. 후원과 함께 조국의 자유 독립을 소망하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동봉하여 김성원 등의 조국사랑을 엿보게 한다: “경계자는 우리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는 신한민보의 배고픈 말을 듣고 어찌 우리가 못 듣는 체하고 있으리오. 대저, 혀끝으로 나오는 열성은 마치 양철 그릇에 물 끓는 것같아서…. 곧 식어버리지마는 마음속으로 나오는 열성은 전기와 같아서 비빌수록 열기를 더 발하나니 혹자 본 지방의 연조가 번번한 것을 염려하였으나, 아니라, 이 무슨 말이뇨. 넓고 넓은 저 들에 푸르고 푸른 무밭은 우리 신한민보를 구급할 약재가 정녕하고, 높고 높은 저 언덕에 울창한 수목은 우리의 독립군을 기르는 양식이 분명하니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염려할 바 있으리오. 우리의 주머니 속에 쟁쟁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을지면 우리가 하루 세 때 먹기를 굶기 전에는 신한민보 너도 또한 굶지 않을지라. 조금도 낙심 말고 소리를 크게 하여 앞으로 저벅저벅 빨리 걸어 태산준령 어서 넘어 자유 복지 인도하라.”
1913년경에 롬폭에서 20여 명의 한인 동포들이 김성오의 캠프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김성원뿐만 아니라 위에 소개한 신한민보에 후원한 대부분 동포가 모인 가운데 장로교 순회 전도사였던 민찬호가 예배를 인도했을 것 같다. 미국 북장로교 가주 동양인 선교사 라플린 목사는 그해 5월에 개최한 미국 북장로교 내지 선교부에서 “가까운 미래에” 한인 장로교회가 세워질 것으로 보고했다. 그 후 라플린 목사는 민찬호 순회 전도사를 롬폭에 파송하였다. 1914년 4월에 세례식이 롬폭 제일장로교회에서 있었다. 그날에 서DW 부인, 김성일, 강WC, 황CO, 장덕우가 세례를 받았고, 김EH의 아들 앤드루가 유아세례를 받았다. 이후 롬폭 한인 장로교회는 5년간 계속되었다.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
신한민보는 1910년 11월 30일의 ‘스탁톤 동포의 발전’이라는 기사에서 한인들이 스탁톤 인근 곳곳에 농장을 세우고, 한인의 농업근거지를 삼아 장래 경영을 크게 하는데 각 처에 자본 있는 동포가 날로 모였고, ‘전도 희망이 적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상항 한인 감리교회 목사이자 항구 선교사였던 이대위 목사나 미국 남감리교 태평양 연회 내 동양 선교부 소속 황사용 순회 전도사가 스탁톤을 가끔 방문하였을 것이다. 1914년에 스탁톤에 미국 남감리교 한인 기도처가 조직되었고, 김성원이 스탁톤 한인 기도처 평신도 대표가 되었으므로 이대위 목사나 황사용 순회 전도사가 방문하지 않았을 때 김성원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인도했을 것이다.
상항 옥 스트리트 1053번지에 있던 상항 한인 감리교회에서 1915년 6월 26일 토요일에 제1차 한인교회 지방 연회가 개최되었다.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성원을 비롯하여 항구 선교사인 이대위 목사, 황사용 전도사, 상항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황사선과 강영승, 삭도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찬일과 이응목, 마운틴뷰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원택과 허 섭, 오클랜드 한인 감리교회 평신도 대표인 김필권과 임준기가 참석했다. 이대위 목사가 개회 예배를 간단하게 인도한 후 임준기를 서기로 선출하고 회무에 들어갔다. 먼저 북가주 한인교회 사역에 관한 보고가 있고 난 뒤 제반 문제를 의논하였다. 특별히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에 대한 결의가 있었다.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는 지역 전도사나 권사가 없었으므로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는 지방 전도사에게 비용을 충분히 지급하여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를 방문하고, 한 달에 적어도 두 번 예배를 인도하도록 하였다.
1915년 태평양 연회 동양 선교부는 황사용을 작년에 이어 새크라멘토 시찰회 순회 전도사로 파송하였다. 그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를 방문하고, 한 달에 적어도 두 번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성원은 본 교회 평신도 대표이자 권사로 파송 받아 순회 전도사가 방문하지 못한 주일에는 예배를 인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황사용 순회 선교사는 김성원에게 와이오밍 신한촌 광산지의 지인이자 신한촌 교회 지도자였으므로 두 사람 모두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를 상당히 효과 있게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해 스탁톤 한인 감리교회에는 8명의 세례교인과 6명의 학습 교인이 있었다.
스탁톤에서 15마일 떨어진 중가주 맨티카 인근 지역 12곳에서 여러 동포가 무이사탕수수 농장을 단독으로 경작하거나 동업하였는데 크게는 300에이커의 농장을 가진 자도 있었다. 김성원은 1916년에 맨티카에서 무이사탕수수 농장 10에이커를 단독으로 경작하였다. 그러나 중도에 폐지하는 바람에 크게 손해를 보았다. 그래서인지 다뉴바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북가주 트레이시로 이주한 김성원은 우체국 사서함을 열고, 서양 음식점 ‘런치 카운터’를 운영했다. 혼자서 영업하면서 힘든 가운데 1918년 5월에 신한민보에 매물로 내놓았다. “양찬관 사시오”라는 타이틀 아래 다음과 같이 광고했다: “나 김성원의 풀방에는 그 안에 ‘런치 카운터’가 있사옵고, ‘빠버쌉’이 있사옵고, ‘시가 스탠’이 있사옵는데, 이 런치 카운터를 우리 동포 신달윤 씨가 한 1년 하다가 너무 일에 골몰하여 그만두신 후로 저 혼자 있사옵는데, 이 자리를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과 백인들이 다들 사겠다 하나 좋은 영업 자리를 팔 맘이 없어 아니 팔고, 뜻이 있사옵거든 제게로 문의하시옵소서. 같은 값이면 동포에게 팔겠사옵나이다. 모든 ‘디쉬’와 ‘팬’은 있사옵고, 자본은 없어도 시작할 수 있사오니 사실 터이면 사시고, 동업하시던지, 또 여기서 일을 하시던지 원대로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김붕화 씨와 홍정식 씨를 원하옵니다. 만일 속히 원하는 이가 없으면 외국인에게 팔겠습니다.” 식당을 힘들게 운영하던 가운데서도 그는 그해 8월에 국민회에 의무금을 냈고, 그해 11월에 북가주 트레이시에서 150마일 이상 떨어진 남가주 다뉴바에 사는 김석길의 병원비로 50센트를 후원하였다.
김성원은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다. 1918년 11월에 자신에게 빚진 자에게 빚을 갚아달라는 광고를 신한민보에 냈다: 채무자와 채무액은 다음과 같았다. 조동오 55원, 임대윤 10달러 55전, 조하윤 9달러 5전, 오대도 8달러 35전, 양순진 11달러 50전, 박성칠 20달러, 최성달러 5달러, 신봉서 2달러 65전, 인홍규 6달러, 이창석 3달러 50전, 임병숙 3달러 50전, 김경함 1달러 45전, 박 연 1달러 75전. 그리고 이상 여러분은 자신이 거주하는 샌프란시스코 히위스 블루바드 410번지로 보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런데 석 달 후인 1919년 1월 16일에 김성원은 자신에게 빚진 자에게 빚을 갚아달라는 광고를 두 번째 신한민보에 냈다. 채무자와 채무액은 대체로 같았으나 모 씨 47달러 70전이 추가되었다.
다른 한편 빚을 갚아달라는 첫 번째 광고한 그해 12월에 무보수 평신도 한인 선교사였던 이경의의 장례비로 얼마를 기부하였고, 두 번째 광고를 내던 그해 1월에 신한민보 식자 기계 구매를 위한 제38회 동맹자 모집에 그의 이름을 올렸고, 그해 2월에는 국민회에 특별 의연을 하였고, 그해 6월에는 독립의연을 했다.
김성원은 1920년 초에 병이 나서 샌프란시스코 공립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신한민보에 세 번째 게재했다: “본인이 신병으로 상항 공립병원에 들어와 벌써 월 여를 고생으로 지나는 중 수중에 돈푼이나 있어야 하겠사오니 본인에게 갚을 시험조가 있는 여러분은 다 좀 속히 그 돈을 국민회 지방총회 안 최진하 씨에게로 부송하시면 감사하겠삽나이다.”
입원한 김성원은 불행하게도 1920년 3월 23일에 40세의 일기로 상항 공립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에게서 무보수 평신도 독신 사역자의 애환을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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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0.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