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태성은 고종 25년 1888년 9월 15일에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한자 이름은 李太成 또는 李泰成으로 적었다. 그는 세례를 받아 장로교인이 되었다. 하와이 노동 이민을 계획한 이태성은 광무 8년 곧 1904년 1월에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반쯤 건너 그달 23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로마자 알파벳으로 Ye Tai Sung으로 썼다.
이태성은 오아후섬 에와에 있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에와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몇 년간 농장 생활을 한 후 통역자로 변신하여 하와이 법정에 선 동포를 위하여 통역하였고, 이민을 살아가는 동포를 돕는 이민 센터에서 봉사하였다.
호놀룰루 한인 기독청년회 총무
이태성은 1914년에 호놀룰루 기독청년회(YMCA) 한인부 총무로 선임되었다. 호놀룰루 기독청년회 한인부는 누아누 청년회 한인부라고도 불렸다. 그는 한인 청년을 위하여 직업교육을 담당하였고, 미국 본토로 유학을 가는 한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권사
1918년 3월 14일부터 17일까지 4일간 제13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이 연회에서 감독 애드나 W. 레오나르드 목사는 이태성을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하와이 선교연회는 이태성 외에도 한채명과 연계송을 본 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본 교회에 지방전도사로 안원규, 남세윤, 박낙M을 파송하였고, 방WC를 작년에 이어 담임목사로 파송하였다.
이태성이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될 당시 본 교회의 교세를 그달에 하와이 선교연회에 보고된 교회 통계에서 찾을 수 있다. 학습 교인은 34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16명이었으며, 주일 학교는 두 곳에 있었는데 교사와 직원은 21명이었으며, 등록한 학생은 181명이었고, 엡워스 청년회에 28명이 등록하였다. 훈련을 위하여 40달러를 지불하였고, 기타 비용이 50달러였다. 예배당은 당시 시가가 32,000달러였고, 지난 한 해 동안 건물에 든 비용은 320달러였다.
제14회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가 1919년 3월 6일부터 9일까지 4일간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있었다. 이 하와이 선교연회는 이태성을 2년째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하였다. 지방전도사로 작년보다 1명이 더 많은 4명을 파송하였는데 안원규, 남세윤은 작년에 이어서 이해에도 파송되었고, 박낙M 대신에 정원명과 황계수를 파송하였다. 방WC 목사는 다시 파송되었다. 그런데 1919년 하와이 선교연회록에 교세 통계 보고가 실리지 않아 이태성이 섬긴 1년간의 통계를 찾을 수 없다. 이태성은 2년간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 권사로서 섬겼다. 호놀룰루 제일 한인감리교회 권사직을 그만두면서 1920년부터 이태성은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호놀룰루 한인 기독청년회 총무
1922년 3월에 이태성은 동양인의 덕예지(德禮知) 교육을 장려하였다. 특별히 연내 각 방면으로 확장을 계획하면서 1천 명 회원 모집 캠페인을 열고 각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해 10월에 150여 청년이 간친회로 모여 관현악단의 행진곡 후에 이태성이 간단하게 소개한 후 김찬제의 개회사, 김페이트의 독창, 관현악단의 연주, 구락부 대표 박관두, 강영각, 김길석, 문 욱, 박진하의 간단한 연설, 유스시의 피아노 독주 등이 있은 후 친목하고 알로하오리를 부르고 마쳤다.
이듬해 4월에는 YMCA에서 100여 명 한인 남녀 학생이 친목회로 모여 일동이 창가를 부른 후 취지 설명이 있었고, 남페니가 독창하고, 안원규가 연설하며, 강영각이 나팔 독주를 하고, 정원명이 연설하며, 박쪼스핀이 독창하고, 환등 관람 후 이태성이 답사를 하였다. 유희와 다과가 있고 난 뒤 알로하로 마쳤다. 그해 6월, YMCA 한인부의 1년 사업을 보고했다. 첫째, 통상 회원이 78명, 특별 회원이 28명, 명예 회원이 1명, 사업 회원이 1명, 학생 회원이 35명, 유지 회원이 4명, 목사 회원이 14명으로 총회원이 61명이었고, 둘째, 특별복음회를 20차 모였는데 구세주를 믿기로 작정한 형제가 4명이었고, 성경 공부는 36차 집회하였는데 참석한 인원은 199명이었다. 셋째, 총 8차 사교회에 참석한 인원이 765명이었으며, 34차로 모인 오찬회와 애찬회에 참석한 인원은 620명이었다. 넷째, 교육을 위한 41차 집회에 참석한 인원이 1,302명이었고, 46차 모인 구락부에 720명이 참석하였으며, 20차 모인 국어교사 연습회에 115명이 참석하였고, 12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 동안 와일루아 해변에서 모인 교육 관계 모임에 18명이 참석하였다. 다섯째, 서적부는 53차 집회하였는데 617명이 참석하였다. 일곱째, 동서양을 내왕하는 33척 기선에 올라 전도하였는데 한인 30인과 미국인 8인을 만났고, 그들은 선교사, 교육가, 정치가, 사업가 그리고 학생이었다. 여덟째, 병원과 감옥을 심방하였는데 문동 병원에 6인, 살성 병원에 46인, 리아히 홈 병원에 14인, 감옥에 죄수 12인을 심방하였다. 아홉째, 공동사업부는 한인 사무편리소, 한인교사 연습회, 한인 사업회 그리고 각 종교사회와 활동하였다. 마지막으로 특별한 사정과 불행한 연고로 인하여 사업 없이 방황하는 동포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노동을 주선하여 직업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해 7월에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연회 산하 한인부가 한국어 학교 교과서를 편찬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4명 교섭위원에 이태성이 포함되었다. 같은 달에 누아누 청년회관에서 각 교회와 사회단체 대표가 모여 모국에 세울 민립대학을 위하여 기성회를 조직하고 재정을 모아 미주 동포와 같이 후원하기로 하고 간부 임원을 조직하였는데 이태성은 재정모집원으로 안원규와 김이제와 함께 선임되었다. 그런데 ‘이곳 우리 적은 소학교도 부지하기에 이처럼 어려운데 어찌 대학교 설립을 위하여 없는 돈을 내리요’하는 반대 목소리도 있었다. 그달에 여러 번 재정상 착수하지 못하던 미국 북감리교 학생기숙사를 추기 개학에 맞추어 남자기숙사만 세우기로 하고, 이태성 외에도 현 순, 안원규, 강영각이 극력 주선하기로 하였다.
1923년 8월에 이태성 등 3인 교섭위원이 YMCA 회관에서 한국어 초등/소학 3권을 출판하기로 하고 국민보사 영업부에서 인쇄하기로 공결하였다. 한인 청년 음악 발달이 필요함을 깨닫고, 가을부터 음악부를 설치하여 음악을 가르칠뿐더러 음악대를 조직하고, 음악 재능을 갖춘 강영각을 초빙하였다.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한인 500여 명이 학살한 사건에 대하여 호놀룰루에 있는 대한인 민단이 주최하여 워싱턴에 있는 구미위원부를 통하여 미국 국무성에 조사를 청원하기로 하였는데 이태성이 5인 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11월에 하와이 한인사회와 종교단체 대표 10여 명이 발기하여 금주 금연을 목적으로 한인교풍회가 조직되었는데 YMCA 대표로 이태성이 선임되어 봉사했다. 그해 연말에 하와이 대학생 조재연이 동 대학 대표로서 캘리포니아주 아세로마에서 개최되는 학생대회에 참석하였다.
1924년을 맞아 새로 임원을 조직하였다. 회장에 양유찬, 부회장에 정태화, 서기에 강영각이었고, 이태성은 재무와 총무를 겸임했다. 그해 2월에 YMCA 한인부는 호놀룰루에 본부를 둔 범태평양회에 가입하였다. 이태성이 YMCA 한인부 총무로서 10주년이 되어 3개월간 휴가를 얻어 그해 6월에 샌프란시스코를 들러 상항 사업가 주최로 금문 공원에서 80여 명이 모인 야유회에 참석한 후 시카고에서 여러 기관을 방문하였고, 7월에 시카고 한인감리교회 설립 예배에 참석하여 YMCA 한인부 총무로서 축사를 담당하였다. 그해 마지막 달에 정성복이 테네시주에 있는 레바론 대학에 입학하여 약간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이듬해 3월에 10일간 이태성은 한인 회원 모집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필지성과 함께 이태성은 그해 9월에 하와이 한인학생연회보를 발간하여 한인 기독 학생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한인 기독학생의 정체성 교육에 노력했다. 그달에 1만여 달러로 건설한 한인 감리교 기숙사를 가을 학기부터 확장하기 위하여 최두욱을 재무로, 김이제를 간사로 선임하여 감리사 프라이 박사에게 청원하기로 하고, 이태성 등으로 6인 이사회를 구성하였다. 제일한인감리교회 찬양대가 한동안 없었는데 그해 연말에 이태성이 앞장서서 지휘자로 강영옥을, 피아니스트로 황노라를 세우고 다시 조직하였다. 이태성은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던 조국을 돕기 위해 ‘연합구제금 모집위원회’에 가담하여 선전부 책임자로 활동했다.
1927년 4월에 5일간 범태평양 교육대회가 호놀룰루에서 모였는데 이태성 등 3인 준비위원회는 미국 내무성 일행과 각국 대표를 위한 환영회에서 태극기를 세우고, 환영 초대 만찬에 한국 음식을 제공하며, 미국 대학을 졸업한 한국 학생을 그 대학 대표로 주선하였다. 그해 7월에 이태성은 약 40명 청년을 모아 호놀룰루 인근 카니오히에서 나흘 동안 원족회를 개최하였고, 그해 7월에 아동 캠핑이 3일 동안 40여 명 아동을 모아 목고리아 해변에서 있었다.
1928년 4월에 하와이 호놀룰루 유지인사가 대한민족 통일촉성회를 조직하였을 때 이태성이 27명 위원회와 서무부 7명 집행 위원에 선임되었는데 하와이에 거주하던 이승만 박사 등 여러 명이 축하문을 보냈다. 2년 뒤 8월에 하와이 대학에 한국 국어와 역사 등의 과목을 신설하기 위하여 이태성 등 호항 유지인사가 ‘한국어, 문화 및 역사 위원회’를 발기하고, 오찬회를 열어 그해 동 대학에 재적한 학생 중에 한국 문학에 취미를 가진 학생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고, 이들 과목을 가르칠 교수를 찾도록 하였다.
이태성은 1931년 5월 말에 16년간의 총무직을 사직하였다. 이듬해 11월에 그의 노력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각 학교와 등록된 남녀 학생은 중앙 중학교에 55명과 45명, 칼라카와 중학교에 5명과 2명, 릴리휴아 중학교에 70명과 60명, 리리요칼라니 중학교에 13명과 7명, 맥킬리 중학교에 57명과 48명, 우로스빌트 중학교에 1명과 3명, 와싱톤 중학교에 4명과 12명, 가와이 중학교에 9명과 2명, 힐로 중학교에 각각 26명, 호노가와 중학교에 4명과 2명, 코나와나 중학교에 각각 4명이었다.
총무직을 사임한 후에도 이태성은 1935년에 상항 한인감리교회에서 ‘청년 운동의 필요’에 대해서 설교하였고, YMCA 한인부 대륙관광단을 조직하여 나성과 덴버를 여행토록 주선했으며, 이듬해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한국 교회를 핍박하는 일제를 세상에 폭로하기 위하여 하와이 한인 예수교 연합회가 조직한 7인 이사회 이사로 봉사했고, 하와이 군도를 순행하며 한인 교회와 청년 단체를 방문하고 전도 강연을 하였고, 1939년에는 한중 동맹단 6인 이사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대/중/소 하와이 한인 졸업생이 300명이라고 신한민보에 알린 다음 달인 1942년 5월 22일에 이태성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튿날 23일에 예배당에서 내외국 인사가 모인 가운데 장례식을 하였는데 그의 죽음은 한인사회의 일대 손해라고들 하였다. 그가 소천한 지 63년이 되던 2005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하와이 한인 청년 교육사업에 이바지한 그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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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3.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