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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한명교 (1873-1964)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한명교는 1873년 1월 12일이나 다음달 12일에 한국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연동에서 거주하였다는데 서울 종로에 있는 연동일 것 같다. 그는 32세가 되던 1905년 4월 13일에 하와이 농장 노동자로서 곱틱 기선에 의지하여 일본 고베를 떠났다. 그런데 그가 하와이 호놀룰루에 그달 24일에 도착했다고도 하고, 다음 달 8일에 도착했다고도 한다. 호놀룰루에 도착하긴 했으나 건강 검진으로 호놀룰루에 내리기는 다음 달 8일이 아닌가 싶다. 그는 영어 이름 표기는 Han Myeng Kio와 Han Myeng Kyo로 사용되었으나 Han Myung Kyo가 옳은 표기다. 하와이에 온 지 5년이 되던 1910년에 그는 하와이섬 호녹가이지에서 박근섭과 오방병 등과 함께 거주하면서 노동했다. 당시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 교역자는 최진태였고, 학습교인 26명에 세례 교인이 12명이었는데 이들 학습교인과 세례교인 명단에 그가 포함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명교가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 산하 하와이 선교부의 전도사가 되기는 하와이에 온 지 약 10년이 되던 1914년이었다. 그는 하와이섬의 파팔노아 한인감리교회에 김창성의 후임자로 파송되었고, 오오가라 한인감리교회에도 파송되었는데 이 교회는 새로 문을 연 기도처였다.

1914년 하와이섬의 파팔노아 한인감리교회 파송, 오오가라 한인감리교회 파송 새로 문을 연 기도처
1924년 파하라 지역에 임시 설교 목사로 파송 1925년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에 임시목사로 파송
1929년 한인교회보 호녹가이지 지사를 담당 1964년 2월 21일에 향년 91세로 하나님의 부름심 받음

이듬해 1915년에는 한명교가 하와이섬의 힐로 한인감리교회와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로 전임되었다. 그는 조연택에 이어서 힐로 한인감리교회로 파송되었는데 그해 하와이지방 총회 힐로 구역민 회장 전익주가 힐로 교회 교인으로 보인다. 한명교는 그해에 한국인 선교 목사로 힐로에 파송되었던 J.O. 와르너 목사와 협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는 그해 문을 연 기도처였다. 낯선 두 교회에 파송된 가운데 한명교는 그해 한국에서 하와이로 온 사진 신부 이은성과 결혼했다. 1916년에도 그는 위의 두 교회를 계속 섬겼다. 힐로 교회에는 권사로 박봉순이 있어서 그해에 한명교가 집사 목사 과정에 들어갈 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해 2월에 그가 맡은 두 교회에서 학습교인이 9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4명이었다. 지난 한 해 동안 14명의 성인이 세례를 받았고, 유아 23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학습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은 어린이가 37명이나 되었으니 집사 목사 과정에서 큰 성과를 가졌다고 보여진다. 그가 맡은 두 교회에 주일 학교가 각각 있었고, 총 7명의 교사가 총 48명의 학생을 가르쳤으므로 교사 한 명당 7명의 학생이면 좋은 교육 환경이었다. 엡윗 청년회에 13명이 가입하여 활동하여 교회 사역에 큰 기둥으로 역할하였을 것이다.

위의 힐로 한인감리교회와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를 2년간 섬기던 한명교는 김이제에게 바톤을 넘기고, 1917년에 오아후섬에 있던 한인소년학교 교사로 파송받았다. 1년 전에 75명이 등록하였는데 1917년에도 그 정도 등록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1년 전 등록금이 60달러였으므로 1917년에도 그 정도로 생각된다.

1918년에 한명교는 파송을 받지 못했다. 그는 하와이 농업 회사에 소속되어 하와이섬의 파하라 농장에서 노동하는 가운데 파하라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그해 2월에 하와이 감리교 연회가 파송한 파하라 한인감리교회 담임교역자는 서울 정동감리교회가 파송한 박기홍이었고 전도사는 조석C였으며, 23명의 학습교인과 한명교 등 10여 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다. 그해 10월에 한명교는 세계 제1차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했다. 본 징집서류에서 그가 키가 컸고 체구가 컸으며 갈색 눈에 머리카락이 검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명교가 세계 제1차 대전에 종군하게 되어서 인지는 몰라도 1919년에도 어떤 교회에도 파송을 받지 못한 것 같으나 집사 목사 2년차 과정에 있었다. 그런데 그해 2월 21일에 2년 10개월이 된 사랑하는 어린 딸 연숙이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안타까운 사연을 맞아 이 일로 상당히 상심하였지만 어려운 기간을 잘 견뎌냈다.

1920년에 한명교는 그가 노동하며 거주하던 하와이섬의 파하라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로 파송을 받았다. 작년에 이곳에서 사역하던 박종수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하와이섬의 파팔노아 한인감리교회로 파송되었다. 그해 한명교는 아내 이은성과의 사이에서 두 살 6개월 된 아들 흥완과 9개월 된 딸 인숙을 두었다. 그해 인구조사에 나온 파하라에 거주한 16명의 독신 한인과 5가정의 한인은 대부분 그가 목회하던 한인교회 교인일 것이다. 16명의 독신 한인은 송점다 (45세), 정완식(38세), 고영식(46세), 신이영 (36세), 김영신 (45세), 백선민 (40세), 송성와 (44세), 송인식 (51세), 원도칠 (44세), 엄첨사 (59세), 김영화 (36세), 김희준 (45세), 정원선 (53세), 신인식 (48세), 이소원 (33세), 박 준 (54세)이었다. 그리고 한인 가정은 공기선(56세)과 아들 최학선(39세), 최C.K.(38세)와 부인 이 인(26세)과 아들 가황 (1년 4개월), 현매리 (67세)와 아들 공준 (42세)과 손자 손복 (11세), 백원룬 (51세)과 아내 백루명 (33세)과 아들 성각 (8세)과 딸 매리 (6세)와 아들 신각(2년 8개월)으로 4가정인데 한명교 가정을 합하면 5가정이었다. 이들 중 그해 성인 2명이 세례를 받았고, 학습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은 어린이가 2명이었다. 

1921년에는 작년부터 섬겼던 파하라 한인감리교회 외에 한명교는 가우 한인감리교회도 맡았다. 가우 한인감리교회는 그해에 새로 문을 연 기도처였는데 한인 노동자가 이곳으로 노동하러 왔기 때문에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한 해 동안 파하라 교회에서는 성인 1명이 세례를 받았고, 유아 2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교육받고 세례를 받은 어린이가 13명이나 되었다. 주일 학교에 관한 보고는 없었다.

1922년 2월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제일감리교회에서 5일간 하와이 연회가 있었다. 이 연회에서 한명교는 집사 목사로 참석했다. 그해 한인 집사 목사로는 그 외에 박종수와 황사용이 있었고, 한인 장로 목사로는 이관묵, 이선일, 임찬호가 있었다. 윌리엄 H. 프라이 감독의 보고에 따르면 한명교는 파하라 한인감리교회 교인을 신실하게 섬긴 목자로서 한인 노동자들이 높이 존경했고, 한인 노동자가 속해 있는 농장 감독에게 한결같은 친구였다. 한 해 동안 성인 3명이 세례를 받았고, 유아 세례를 받은 유아가 4명이었고, 학습 교인이 된 자가 1명이었다. 그해 지출은 200달러였고, 헌금액은 80달러였으니 적자였다. 지난해 주일학교와 엡윗 청년회와 교회 재산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 1922년에는 한명교가 파하라 한인감리교회와 나하레후 한인감리교회를 맡았다. 가우 농장에서 노동하던 한인들이 나하레후 농장으로 이동하여 가우 교회는 문을 닫았고, 그 대신에 나하레후 교회가 새로 문을 연 것으로 보인다. 파하라 교회에서 한 해 동안 2명이 학습교육을 받아 학습교인이 되었다.

1923년에도 작년과 같은 장소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2월 28일부터 3월 4일까지 계속되었다. 지난 한 해 동안 그는 D.H. 크라인펠터와 T. 코무로와 함께 하와이 선교부 산하 ‘해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위의 연회에서 그가 소속된 위원회는 3가지를 보고했다. 하와이 지역 거주 감독인 A.W. 레오나르드 목사에게 정성을 다하여 ‘알로하’의 인사를 표했고, 지난 한 해 동안 하와이 선교부의 사역과 특별히 연회에 대하여 풍성하게 광고한 신문사에 진정한 감사를 표하였으며, 연회에 참석한 여러분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오찬을 제공한 제일 감리교회 목사 M.H. 알렉산더 박사와 여선교회 회원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해 그는 하와이섬의 파하라 한인감리교회만 맡았던 것으로 보아 나하레후 농장에서 노동하던 한인 노동자들이 모두 다른 농장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명교는 1924년에도 파하라 지역에 임시 설교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가 1925년에는 하와이섬의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에 임시목사로서 파송을 받았다. 1년간 그는 유아 2명에게 유아세례를 주었고, 성인 14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926년과 1927년에는 그가 임시 목사 명단에 있었다. 1928년에 하와이섬의 호녹가이지 한인감리교회에 임시 목사로서 파송을 받았고, 1929년에도 위의 교회에 파송을 받았으나 본 교회에 대한 통계는 게재되지 않았다. 

 1914년에 출간한 한인교회보가 1929년에는 총 30쪽으로 표지 1쪽, 한국어판 16쪽, 영어판 12쪽, 영문판권 1쪽으로 구성되어 호놀룰루에서 발행되었는데 홍한식이 한국어판 편집인이었다. 1929년에 한명교가 한인교회보 호녹가이지 지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외 지사에는 호놀룰루 팔라마 지사에 신국겸이, 가와이 지사에 현 순이, 힐로 지사에 이관묵이, 와히아와 지사에 안창호가, 와일루아 지사에 이동빈이, 와히파후 지사에 강의주가, 마위 지사에 임준호가 맡았다. 이들은 대부분이 목사나 전도사였다.

이듬해인 193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한명교는 하와이섬의 호녹가이지에서 자영업에 종사했고,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호녹가이지 교회에 시간제 교역자로 파송을 받았다. 그해 한명교는 아내 이은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세 아들인 존, 조셉, 사무엘과 두 딸인 매리와 도라를 두었다. 1931년 2월 연회 보고서에는 이관묵 목사가 담임이었고, 22명의 학습교인과 15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다. 1931년과 1932년에도 그는 호녹가이지 교회에 시간제 교역자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1933년부터 그가 파송을 받지 못했다.

1940년에 개최한 하와이 선교부 연회에는 한명교가 박창식과 함께 집사 목사로 기재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해까지도 시간제 교역자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43년 9월에 감리사 프라이 박사의 사회로 호항 한인감리교회 계삭회가 호항 한인감리교회에서 16명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계삭회에서 한명교는 임준호, 박지홍, 박종수와 함께 휴직 목사로 보고되었다.

1950년대에 하와이에 있던 국어학교 일체가 해산되었을 때 한인사회 원로였던 한명교는 임준호, 정두욱, 이홍기, 이덕배, 함흥식, 이정근, 이명우 등의 한인사회 원로와 함께 학회를 조직하여 교회 내에 국어학교를 설치하는 청원을 했다. 하지만 제사와 같은 한국 전통문화 보존에 있어 위의 원로들과 이동진과 안창호 간에 논쟁이 일어나 한국 학교가 교회 내에 설치되지 못했다. 당시 한국 학교 논쟁은 심지어 힐로에서도 일어나 황인환, 이병운, 김붕서, 백만금 등이 이관목의 국어학교 교수 방식에 반대하여 교회 재판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한명교는 1964년 2월 21일에 향년 91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누아누 기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amien.sohn@gmail.com

08.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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