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백운택 (白運澤)은 1883년 3월 20일에 한국에서 태어나 소학교를 졸업했다고도 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도 한다. 그는 노동 이민으로 1903년에 하와이에 도착하면서 Paik Woon Taik으로 통했다.
박용만이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국보 주필로 부임하면서 이듬해 5월에 하와이 정부로부터 특별경찰권을 승인받아 하와이 각 섬에 대한인국민회 경찰부장을 설치하여 일본 정부의 간섭을 배제했고, 1914년 6월에 하와이 오하우섬 가할루에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창설하여 독립군 양성을 본격화하여 100여 명 단원이 군단에 기숙하면서 농장에 나가 노동을 하면서도 야외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교실에서 군사학을 공부했다. 사관학교는 미국 군대를 모방하여 군단사령부 단장에 박용만, 부관에 구종권과 태병선, 장재에 최순서, 서기에 백운택을 선임하였고, 군단사령부 외에 군단 경리부, 제복소, 병학교, 훈련소 대대, 훈련소 중대, 훈련소 소대, 별동대, 전호수, 경수 등의 조직이 있었다. 1916년에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이 취소되어 1917년에 위의 사관학교는 문을 닫았다.
1917년 1월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가 모여 신임 임원을 선출했다. 총회장에 안현경과 부총회장에 이종홍이 되었고, 총회장의 인선에 따라 백운택은 재무로 선임되었다. 그 외 임원으로는 총무에 김광옥, 서기에 박운택, 학무원에 손창희, 법무원에 박원걸, 구제원에 박승준, 농상부장에 오 훈, 군무부장에 정두욱이었다. 백운택은 1919년 8월에 독립운동의연금을 기부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그리고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등에서 하와이 한인사회에 적지 않게 영향력을 발휘한 백운택은 안순남과 정영W와 함께 1919년 3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14차 하와이 연회에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임명되었고, 그는 가와이섬 구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해 파송된 한인으로는 하와이섬에는 힐로에 김이제, 호녹가이지에 박기홍, 고하라에 이관묵, 파할나에 한명교, 파파로아에 박충수, 가와이섬에는 골로아와 막가웰리에 박WT, 리휘에 안상호, 마우이섬에는 하나에 장영환, 스프렉클스빌에 홍한식, 그리고 오아후섬에 에와에 임준호, 호놀룰루에 홍한식, 와히아와에 임찬호가 있었다.
백운택은 그해 가와이섬의 골로아와 막가웰리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을 찾아 전도하면서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와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를 시무했다. 1920년 2월까지 1년간 어린이 3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학습을 받은 어린이 26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20명의 학습 교인이 등록하였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20여 명이었다. 이 구역에 주일학교를 한 곳에 설치하고 직원과 교사로 2명을 임명하였으나 등록한 학생은 없었다. 예배당 건물이 4곳에 있었는데 건물과 대지의 시가가 2,420달러나 되었다. 한 해 120달러를 지출하였고, 100주년 기금으로 68달러를 헌금했다.
1920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15차 하와이 연회에서 A.W. 레오나르도 감독은 백운택을 가와이섬의 리휘/길나위아 구역에 구역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함준후 와 송공순을 권사로 임명하였다. 백운택은 와이메아에 거주하였는데 그해 이곳에 거주했던 최기옥(44세)과 그의 부인 순광(28세)과 아들(4살 6개월) 그리고 처남 이태채(9세), 김수선(26세), 김창수(22세)와 그의 부인 Y각(21세)과 딸 C혜(3세)와 아들 T길(1.5세)과 어머니 김춘옥(53세)과 동생 C살(11세), 임용상(60세)과 그의 부인 임마다 (58세)와 아들 규(30세)와 처제 임강시(31세)와 손자 성숙(2세)은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으로 보인다.
백운택은 리휘 한인감리교회에서 1921년 2월까지 1년 동안 성인 세례자나 유아세례자가 생겨나지 않았으나 학습을 받은 자는 19명이나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한 해 동안 교인 4명이 사망하는 슬픔을 맞았다. 주일학교를 설치하여 25명이 등록한 가운데 교사 한 명이 가르쳤다. 예배당 건물과 사택이 있었는데 예배당 건물과 대지는 1,000달러에 해당하였고, 사택은 예배당보다 500달러가 많은 시가 1,500달러였다. 그리고 100주년 기념 기금으로 29달러를 헌금했다.
지난 1년 동안 골로아 한인감리교회에서는 세례교인이나 유아세례교인이나 학습교인은 생겨나지 않았고, 교회학교도 없었으나 100주년 기념 헌금으로 18달러를 헌금했다. 이 교회에는 사택은 없었으나 예배당 건물이 있었는데 대지와 건물이 1,000달러에 해당했다.
막가웰리 한인감리교회는 골로아 교회처럼 세례교인이나 유아세례교인이나 학습교인은 생겨나지 않았고, 교회학교도 없었으나 100주년 기념 헌금으로 6달러를 헌금하였는데 위의 세 교회 중 가장 연약했다.
백운택은 1921년 2월에 오아후섬의 구역 선교사로 파송받아 와일누나 한인감리교회와 인근 가후구 한인감리교회와 같은 섬의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를 섬겼다. 그해 오하후에 파송받은 한인으로는 에와 한인감리교회와 와이파후 한인감리교회에 파송된 임찬호, 호놀룰루 한인제일감리교회에 파송된 황사용, 위의 교회에 파송된 권서 조TY 부인이 있었다. 그리고 오아후섬에는 필리핀 사역과 일본 사역도 있었다. 필리핀 사역을 위하여 아이에아, 펄하버, 호놀룰루, 가후구, 와이마나로, 와이파후 등에 필리핀인 전도사와 간호사를 파송하였고, 일본 사역을 위하여 아이에아, 펄하버, 가하루우 그리고 호놀룰루에 일본인 전도사를 파송했다.
1919년 3월 제14차 하와이 연회에서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임명
1923년 2월 하와이 감리교 선교단 한인부의 관리하에 있는 한인교회보에 파송
1948년 12월 27일에 향년 66세에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음
2011년 대한 독립에 관한 공훈을 기려서 건국포장을 추서
지난 1년간 신실하고 성공적으로 사역했다는 보고에 따라 백운택은 브라우리오 T. 마가파갈, 가브리엘 D. 자비어와 함께 집사 목사 과정에 등록하여 1년 차에 들어섰고, 그달에 몬로 H. 알렉산더, V. 라자로, 일본인 소조 아라가와와 가수 히가 그리고 황사용과 함께 하와이 연회 엡워스 연맹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그해 10월에 하와이에서 포화대조선국민대표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본회는 해내외에 산재한 민족의 난국을 수급하여 최고기관을 완성하기 위하여 성립되었는데 대조선민족의 혈통으로 절대 독립운동에 대하여 물질과 생명을 바치는 자는 아무나 본회에 가입할 자격이 있었다. 회장은 황사용, 부회장은 신홍균, 총무는 조병요, 재무는 강영효 그리고 서기는 김진세였고, 백운택은 임준호, 김난수, 정두옥, 주명근, 이상호, 최두옥, 이종홍, 유동면, 함삼녀, 남세윤, 이선일과 함께 대조선국민대표 기성회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와일누나 한인감리교회에서 1922년 2월까지 1년간 목회하여 성인 한 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15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2명이 학습을 받았다. 그달에 세례교인은 23명이었으며,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13명이었지만 평균 매주 10명이 출석하여 교사 한 명이 가르쳤다. 그달에 예배당 건물과 대지의 시가는 4달러에 불과했고, 1년간 지출은 10달러였으며, 백주년 기념 기금은 1년 지출금의 다섯 배가 되는 50달러나 되었다.
1922년 2월에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제17차 하와이 연회에서 감독 찰스 L. 미드 목사는 백운택을 하와이섬의 코하라 구역에서 노동하는 한인 노동자를 전도하기 위하여 구역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달에 그는 브라우리오 T. 마가파갈과 가브리엘 D. 자비어와 함께 집사 목사 과정 2년 차에 들어섰다. 그런데 1923년 2월 연회록에는 그가 맡은 코하라 구역에 대한 목회 보고가 없어 그의 목회 소식을 확인할 수 없다.
이듬해인 1923년 2월에 백운택은 한인교회보에 파송되었다. 한인교회보는 1912년에 하와이 감리교 선교단 한인부의 관리하에 감리교 서적부가 월간으로 호놀룰루 제일한인감리교회에서 인쇄하였고, 초기에는 이승만이 사장이었는데 당시에는 김이제가 한인교회보의 편집인이자 발행인이었다.
그런데 백운택은 가브리엘 D. 자비에르와 함께 1924년 2월에 하와이 연회에서의 사역을 중단하면서 집사 목사 훈련 과정도 중단됐다.
1930년 2월에 호놀룰루에서 모인 제25차 하와이 연회에 한인들이 꽤 진출했다. 장로 목사로는 4년째 전도하는 안창호, 20년째 전도하는 홍한식, 7년째 전도하는 현순, 17년째 전도하는 이관묵과 임준호 그리고 5년째 잉여 목사로 있은 김이제가 있었고, 지방 집사 목사로 박종수, 이헨리, 변프리츠가 있었다.
그해를 전후하여 백운택은 하와이 마우이섬의 하나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개교한 ‘하나 한국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그해 임준호가 마우이 구역의 구역 선교사로 파송 받아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마우이 구역에 산재한 한인감리교회를 순회 방문하였는데 지방 전도사 5명과 함께 동역했다. 그가 백운택이 담당한 ‘하나 한국학교’도 감독했을 것으로 보인다. 1938년경에 백운택은 하와이 호놀룰루로 이주하여 본래 산림이었다가 산림 이외의 용도로 전환되어 이용해 온 토지에 인위적으로 다시 산림을 조성하는 재식림 회사에서 노동했다.
1905년 11월 17일에 한일 늑약이 체결된 후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합병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지 36년이 되던 1945년 8월 15일 수요일에 일본제국의 패망으로 36년간 일본국 조선현이었던 대한제국이 꿈에도 그리던 독립을 하였다. 광복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4개월 후인 1948년 12월 27일에 백운택은 향년 66세에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여 그달 29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다이아몬드헤드 기념 공원의 색션 D의 83-E에 안장되었다. 45년간 미혼으로 타향인 하와이에서 거주하였지만 대한 독립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겪은 것만 해도 백운택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에 백운택에게 대한 독립에 관한 공훈을 기려서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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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