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동빈(李東彬)은 1898년 7월 16일에 평양 북쪽 안주에서 태어나 1905년에 노동 이민자 자녀로 하와이로 이동하여 이헨리로 불렸다. 호항 사우스힐로에 있던 힐로 기숙사 남자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던 1916년에 이수잔과 결혼했다. 이화여전을 졸업한 신부는 박용만이 1918년에 호항에서 펴낸 태평양시사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이동빈은 최두환, 이기복, 박범구, 이피터, 노원만과 함께 1918년에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던 태평양 중앙학원을 졸업했고, 그해 10월에 세계 제1차 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했다. 1920년에는 힐로 기숙사 남자학교에서 교사와 회계사를 겸직했는데 이후 오아후섬 북쪽의 와일누아 농업회사 사무원으로 취직하였고,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에 등록했다. 1923년 6월에 청년 40여 명이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을 위하여 신한소년회를 조직하고 연 2회 와일누아 농장에서 모이기로 하였는데 이동빈이 회장이었고, 부회장에 김찬제, 총무에 강영각, 서기에 노원만, 회계에 김윤옥, 검사원에 서봉성이었다.
1926년 2월에 호항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제21회 하와이 연회에서 와일누아 농업회사 사무원으로 근무하는 이동빈을 포함하여 2명을 와일누아 교회 목사 황사용 목사를 돕는 전도사로 파송했다. 1927년 2월까지 한 해 동안 학습을 받은 어린이 18명이 세례를 받았고, 26명의 세례교인이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그달에 학습교인 20명이 등록했고, 13명이 세례 교인으로 등록하였다. 주일학교에 25명이 등록한 가운데 매주 평균 17명이 출석하였고, 교사와 직원으로 2명이 있었으며, 지난 1년간 주일학교 경비로 5달러를 지급했다. 지난 1년간 본 교회는 138불을 지출했고, 세계봉사기금으로 50달러와 기타 기금으로 10달러를 헌금했다. 하와이 선교부는 지난 한 해 동안 본 교회에 75달러를 지원했다. 1927년 2월에도 이동빈은 와일누아 교회 전도사로 파송됐다. 이듬해 2월에 세례교인 13명과 학습교인 20명이 등록했고, 지난 1년간 세례교인 26명이 타지로 떠났다. 35명이 주일학교에 등록한 가운데 평균 30명이 매주 출석했다.
지난 2년간 지방 전도사로서 필요한 과정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여 1928년 2월에 개최한 23회 하와이 연회는 이동빈을 집사목사 과정 1년 차를 인정하고, 와일누아 교회로 파송했다. 신한민보는 그해 그가 아름다운 집을 장만하고 꽃다운 생활을 하여 대학은 가보지 않았으나 저희의 사업 성적이 대학생보다 배승했다고 칭송하였다.
1929년에 모인 제24회 하와이 연회는 이동빈을 와일누아 교회와 한인교회보 와일누아 지사장으로 파송했다. 윌리엄 H 프라이 감독이 1930년 2월까지 이동빈이 신실하게 교회를 섬겼다고 보고했으나 세례나 유아세례나 학습을 준 자는 없었고, 엡워스 연맹이 활동하지 못했다. 그달에 학습교인은 20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3명이었으며, 사택 임대비가 300달러였는데 하와이 선교부가 제공했다.
1930년 2월에 모인 제25회 하와이 연회는 사우스 킹 스트리트 감리교회에서 이동빈에게 집사목사로 안수하고,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같은 섬의 가후구 한인감리교회로도 파송했다.
교회뿐만 아니라 이동빈은 와일누아 지역에 교회학교를 운영했다. 그해 6월에 강영각의 주선으로 1년 전에 조직한 한인농촌학생회 회원 90여 명이 와히아와 지방에 모여 연의회, 졸업식 만찬회 그리고 유희를 가졌는데 동포들이 50달러를 모아 후원하였다. 이날 이동빈이 황혜수, 강영복, 최성덕, 박동환, 안창호와 함께 권면순서를 맡았다. 이날 동회 음악대도 참석하여 청아한 음악으로 큰 흥미를 주었다.
1931년 2월까지 와일누아 교회에서 이동빈은 성인 5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달에 학습교인은 20명이었고, 세례교인은 8명이었으며, 다른 곳으로 이주한 세례교인은 무려 28명이나 되었다. 주일학교를 처음 조직하여 교사와 직원으로 5명을 임명하였고, 55명이 등록하였으나 평균 45명이 출석하였으며, 주일학교를 위하여 1년 동안 25달러를 지출했다. 그리고 사택 임대비가 300달러였는데 작년에 이어 하와이 선교부가 보조한 듯하다. 그런데 가후구 지역 한인노동자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가후구 교회는 폐쇄된 듯하다.
그해 2월에 회집한 제26회 하와이 연회는 이동빈을 오아후섬 와일누아의 주일학교와 청년회 등 기독교 활동의 디렉트로 파송했고, 1937년까지 계속 파송하였다. 그해 9월 초에 김유택 박사의 집에서 여러 명이 모여 청년운동을 위한 임시 임원을 선택하였는데 회장에 이용직이었고 그는 이싸라잉 등과 함께 이사원이 되어 다음 달에 2, 30명의 청년 인도자를 초청하여 한인청년동맹단을 조직한 후 조국 정신 고취, 친목으로 청년 단합 경영, 사회적 수양을 실천하여 재미 한족의 장래 준비에 목적을 두고, 15세부터 30세까지는 전회원으로, 31세이상 40세까지는 찬성회원으로, 그 이상은 찬성원으로 하고, 찬성원중에 이사원을 두어 모든 일을 주선하게 했다.
삼일절 제13주년 기념으로 1932년 2월 26일에 호항 제일감리교회에서 소년 동맹단 주최로 한인과 백인 등 남녀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가대 경기가 있었다. 이날 이동빈이 인도하는 와일누아 성가대가 2등 장원을 하였다. 이용직 목사가 주장하는 기독교 찬미대가 1등 상자원을 탔고, 강영각 인도의 와히아와 한인감리교회와 박관두 인도의 호항 한인감리교회 찬미대도 참가했다.
1933년 6월 주일 아침 11시에 주일학교 졸업생 축하 예배가 있었다. 중학교와 예비 중학교 졸업생 6명에게 화환을 걸어 축하했고, 순회선교사인 홍한식이 교회가 준비한 선물을 나누었다. 성가대가 청아한 노래로 찬양한 후 교사 정두옥와 교장 이동빈의 축사가 있었고, 개근한 남녀 소년과 유년에게 시상했다. 그해 8월에 와히아와 한인기독교인 중 50여 명이 와일누아 공원에서 미주로 유학 가는 홍제임스를 전송하는 소창 순서를 가졌는데 본교회 박동환 목사, 최창덕, 최선주와 함께 이동빈도 전별사를 담당했다. 그해 10월에는 와이파후 농장에서 농업 하는 김례운의 삼자 안드레와 와일누아에 거주하는 김처후의 영양 씨라의 결혼식에서 이동빈이 주례하여 성대한 잔치까지 있었다. 그해 이동빈의 사회로 성탄축하식이 있었는데 홈스 목사의 축사, 홍한식 목사의 환영사 및 준비위원에 대한 감사담, 찬양대의 찬양, 소년반의 성극, 유년반 암송과 노래가 있었다.
1930년 2월 사우스 킹 스트리트 감리교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
와일누아 한인감리교회뿐만 아니라 같은 섬의 가후구 한인감리교회로도 파송
교회뿐만 아니라 와일누아 지역에 교회학교 운영
1934년 4월에 이동빈이 예배를 인도한 가운데 최원숙 선생의 기도와 찬송대의 찬양후에 홍한식 목사가 고전 15:35을 본문으로 하여‘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기도한 후 찬송대 찬양에 이어 제1장 찬송으로 폐회했다. 그해 6월 15일 밤에 이동빈이 사회한 가운데 농장 클럽 하우스에서 졸업생들을 위한 축하 희락회가 있었고, 그달 17일 주일 아침예배는 졸업생 축하예배로 드렸을 때 이동빈은 졸업생을 위하여 권면하였다. 이날 중학 졸업생은 정남용, 염두시, 박루터, 박찬주였고, 예비중학 졸업생은 정봉금, 정수경, 김 동이었다. 그달 23일에는 와이사와 구락관에서 조미구락부 주최로 100여 명 동포가 모여 회원 자제 중 중학교 졸업생인 임복순, 장줄리아, 민도마, 문덕관을 위하여 성대하게 졸업축하식이 있었다. 이날 정운서, 임두와, 문종현과 함께 이동빈이 권면했고, 청년들이 청아한 음악과 노래 순서를 맡았으며, 졸업생에게 은잔 하나씩을 선물로 주었다. 그해 8월에 이동빈은 주일학교뿐만 아니라 청년회의 진흥을 위해 연구와 주선을 하였고, 다음달에는 찬양대까지 맡았다. 그해 11월에 성탄 경축식 순서위원으로 선정된 그는 수전위원 강윤심, 정봉아, 김권실, 단장위원 지안영, 예물위원 김안식, 재무 김인식과 함께 성탄 경축식 순서를 계획하여 자신이 사회를 맡아 일동의 찬송, 최원숙 교사의 기도, 이옥인의 독창, 청년들의 성탄음악, 유년들의 암송, 홍한식 목사의 축사와 선물 나누기가 있었다. 이날 성탄경축예배를 위하여 11달러 50센트를 지출했다.
1935년에 들어서서 이동빈이 지도한 본 교회 청년회는 회장에 김치영, 부회장에 박마리아, 서기와 재무에 이옥희, 사교 위원에 이옥인, 순서 위원에 박석주, 인도 위원에 안태영을 선임했다. 그해 3월에 호항 선교기념관에서 동지회 주최로 300여 명의 청년이 모여 이동빈이 사회한 가운데 특별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강사인 이승만 박사는 유럽 여행담과 청년의 장래에 관하여 영어로 연설하여 큰 희망을 품게 했다. 그해 6월에 약 200여 명의 동포가 모인 가운데 동지회가 한인 중학교 졸업생 80여 명을 초대하여 축하회를 열었는데 동회 청년부장 이동빈이 흥미를 돋우었다. 3일 후 주일학교 졸업생 축하 희락회가 있었고, 그달 16일에 주일아침예배는 졸업생 축하 예배로 모여 닐니후아 중학 졸업생 정남조, 와일누아 예비중학 졸업생 안에스더, 김줄리아, 김리베카, 김스턴윗, 정남선, 영홍태, 염원태, 이토마스, 박존슨 그리고 오광복에게 화환을 걸어주고 작은 책자를 선물했다. 그해 8월경부터 주일 아침예배에 소년과 유년이 부모와 같이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고, 예전대로 청년들에게 주일 아침 예배 출석을 강조하면서 부모가 협력하라고 부탁했다.
1938년에는 하와이 연회 이후 이동빈은 선교사역에 동참하지 않은 것 같다. 여러 해 와일누아 농장 회계사로 근무하며 자비량 선교사로 사역했던 그가 1942년에 호항으로 이동했다. 호항 스타 불러틴는 그가 1947년 3월 10일에 49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다이아몬드헤드 기념공원묘지에 안장됐다고 보도한다.
amien.sohn@gmail.com
07.23.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