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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박기홍(1872-1956)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박기홍은 1872년 9월 16일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33세였던 1905년 5월 8일에 노동 이민자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그는 하와이섬 가우 파할나에 있는 사탕수수밭에서 힘겹게 노동하면서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다.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부는 1915년 2월에 하와이섬 가우 파할나에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던 박기홍을 파할나 한인감리교회에 평신도 전도사로 파송했다. 박기홍의 전도로 1916년 2월까지 1년간 어린이 3명이 유아 세례를 받았고, 학습을 받은 어린이 8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그해 등록한 학습 교인은 5명이었다. 그해 2월에 학습 교인은 5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1명이었다. 두 곳에 주일학교를 설치하여 6명의 직원과 교사를 세워 20여 명을 가르쳤다. 그런데 지난 1년간 교인 2명이 별세하는 슬픔이 있었다. 

차YC, 한명교, 박종수와 함께 박기홍은 1916년 2월에 집사 목사 훈련 과정에 등록했다. 박기홍은 그달에 작년에 섬기던 하와이섬의 파할나 한인감리교회 외에 나알레후 한인감리교회에도 파송되었다. 나알레후 한인감리교회는 오늘날에는 나알레후 연합감리교회로 변신하여 하와이벨트 길에 있다.

박기홍은 이듬해 1917년 2월에도 하와이섬 파할나 구역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1918년 2월까지 1년간 목회하면서 어린이 1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학습 받은 어린이 5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2명이 학습을 받았다. 그달 2월에 학습 교인은 23명이었고, 세례교인은 2명이었다. 그는 3곳에 교회학교를 설치하여 교사와 직원으로 7명을 세워 등록한 2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지난 1년간 교인 훈련을 위하여 12달러를 지출했고, 자선을 위하여 24달러를 헌금했다. 하와이 연회에서 박종수와 리온 L. 러프부로와 함께 박기홍은 하와이 선교부 산하의 전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박기홍은 1918년 3월에 미국 북감리교 캘리포니아 연회 집사 목사 훈련 과정에 등록하였고, 작년에 이어 하와이 선교부에 소속되어 박종수와 리온 L. 러프부로와 함께 본 선교부의 전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달에 하와이섬의 하갈나우 한인감리교회에 파송을 받아 본 교회 이완구 권사와 김기순 권사와 협력하며 교회를 섬겼다.

박기홍은 안시흡과 함께 병이 나서 입원하였으므로 1919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모인 하와이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달에 박기홍은 하와이섬의 호녹가이지 구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곳에는 박성배 전도사와 이완규 전도사가 있어 전도에 도움이 되었으나 그만큼 활동이 많았다. 1920년 2월까지 1년간 그는 두 명의 전도사와 함께 전도하는 가운데 성인 10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5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2명이 학습을 받았다. 두 곳에 주일학교를 설치하여 등록한 42명에게 7명의 교사와 직원이 가르쳤다. 이전의 교회와는 달리 엡워스 연맹을 조직하였는데 본 연맹 고등부에는 10명이 등록하였고, 본 연맹 중등부에는 9명이 등록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 예배당 건물이 있었는데 건물과 대지의 시가는 1,900달러였다. 한 해 지출은 23달러였고, 100주년 기념 기금으로 64달러를 헌금했다.  

1920년 2월에 박기홍은 집사 목사 훈련 과정 3년 차에 들어섰다. 작년에 이어 그는 하와이섬의 호녹가이지 구역의 구역 선교사로 다시 파송받았다. 1921년 2월까지 1년간 성인 한 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1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학습 받은 어린이 4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17명이 학습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 1년간 교인 2명이 사망하여 온 교회는 크게 슬퍼했다. 그해 2월에 주일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43명이었고, 교사와 직원이 4명이었다. 1,900달러였던 작년과는 달리 예배당 건물과 대지의 값이 650달러 가치로 보고 되어 오타가 아닌가 싶다. 작년과 같이 여전히 사택은 없었다. 1년간 지출은 223달러였으며, 100주년 기금으로 69달러를 헌금했다.

1921년 2월에 박기홍은 집사 목사 훈련 과정 4년 차에 들어섰다. 그달에 하와이 연회는 그를 마우이섬에 있는 한인교회를 담당하는 순회 선교사이자 구역 목사로 파송하였다. 그래서 그는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면서 지역 여러 한인촌을 순회 전도하며 곳곳에 있는 한인감리교회를 섬겼다. 여러 교회의 한인 교인들은 그의 목회를 충성스럽게 보조하였고, 모든 한인 교인이 그를 존경했다. 전도사 한 명과 함께 협력하는 가운데 1922년 2월까지 1년 동안 성인 한 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4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학습 교인인 어린이 80명이 세례를 받았고, 22명이 학습을 받았다. 그해 2월에 학습 교인은 28명이었고, 세례 교인은 30여 명이었다. 40명이 교회학교에 등록한 가운데 평균 28명이 출석하여 교사와 직원 등 4명이 가르쳤고, 엡워스 연맹 고등부에는 20명이 등록하였고, 본 연맹 중등부에는 17명이 등록하여 활동했다. 한 해 동안 지출은 18달러였고, 100주년 기념 기금으로 50달러를 헌금했다.   

작년에 이어 1922년 2월에도 박기홍은 마우이섬 구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이곳에 산재한 일곱 한인감리교회를 섬겼다. 그는 매우 성과 있는 목회를 하였고, 모든 교인은 그를 존경하며 그의 목회에 기뻐했고, 소망 가운데 교회 생활을 하였다. 1923년 2월까지 1년간 전도사 한 명과 함께 협력하면서 성인 2명이 세례를 받았고, 어린이 9명이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학습을 받은 어린이 11명이 세례를 받았고, 5명이 학습을 받았다. 그달에 학습 교인은 96명이었고, 프린트상 착오로 세례 교인을 확인하기 어렵다. 주일학교에 36명이 등록한 가운데 평균 24명이 매주 출석하여 교사와 직원 등 4명이 가르쳤다. 엡워스 연맹 고등부에 14명이 등록하였고, 본 동맹 중등부에는 20명이 등록하였다. 1년간 지출금액은 275달러였으며, 100주년 기념을 위하여 100달러를 헌금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와이 선교부로부터 120달러를 보조받았다.

박기홍은 지난 캘리포니아 연회에서 집사 목사 훈련 과정을 마친 후 1923년 3월에 호놀룰루에서 윌리엄 O. 쉐퍼드 감독으로부터 페르난도 캄포스, V. 파하르도 그리고 로만 우미피그와 함께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달에 그는 작년에 이어 마우이섬 구역 목사로 파송받았다. 그는 1924년 2월까지 1년간 2명의 전도사와 함께 사역하면서 성인 4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어린이 4명에게 유아세례를 주었으며, 학습 받은 어린이 26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성인 15명에게 학습을 주었다. 그리고 주일학교 두 곳을 설치하여 세 명의 교사가 등록한 21명 학생을 가르쳤고, 엡워스 연맹 고등부에 32명이 등록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 1년간 211달러를 지출했고, 100주년 기념을 위하여 100달러를 헌금했다. 그는 지난 1년간 하와이 선교부로부터 작년과 같은 금액인 120달러의 보조를 받았다. 

작년에 이어 박기홍은 1924년 2월에도 마우이섬 구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는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면서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돌보았다. 늘 하듯이 만국주일공과를 통하여 이듬해 2월에는 시편 121:1-8과 마가복음 14:32-42을 읽고 주일공과 제1부 제7과인 ‘예수께서 겟세마네에 계심’을 가르쳤고, 시편 72:1-8과 로마서 13:1-14을 읽고 제1부 제8과인 ‘좋은 국민’을 가르쳤으며, 다음 달에는 이사야 93:1-6과 마태복음 27:11-26을 읽고 제1부 제9과인 ‘빌라도 앞에 있는 예수’를 가르쳤고, 시편 23:11-19과 누가복음 23:33-46을 읽고 제1부 제10과인 ‘십자가 위의 구세주’를 가르쳤으며, 시편 16:5-12과 요한복음 20:1-16을 읽고 제1부 제11과인 ‘부활하신 예수’를 가르쳤다. 

그해 5월까지 1년간 두 명의 전도사와 함께 마우이섬 구역을 섬기면서 1명의 성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4명의 어린이에게 유아세례를 주었으며, 학습 교인 어린이 7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12명에게 학습을 주었으며, 그달에 학습교인수는 89명이었고, 세례교인수는 25명이었다. 한 해 동안 지출은 12달러였고, 세계 선교 헌금으로 8달러를 헌금했다. 그는 예전과 같이 하와이 선교부로부터 120달러의 보조를 받았다.

1925년 5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제20차 하와이 연회에서 박기홍은 한국인으로는 한명교와 김kc와 함께 임시 설교 목사로 채택되었다. 그는 그달에 마우이섬 센트럴 구역의 구역 목사가 되어 파이아 한인감리교회를 담임하면서 구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그는 옛날 감리교회 목회자들이 했듯이 말을 타고 17개의 한인감리교회를 순회하면서 만날 수 있는 한 모든 한인을 찾아가 전도했다. 그 구역에 어린이들이 많아서 그해 여름에 그는 사모와 함께 D.V.B.S. 를 개최하였는데 많은 어린이가 크게 즐거워했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 노동자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명을 감당하다.

 

안타깝게도 박기홍은 그해 성탄절에 흉막염으로 센트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다가 폐결핵으로 진단을 받은 후 마우이섬에 있는 쿨라 요양소에 입소하였다. 그가 별세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는 나름대로 건강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가 전도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순회 전도하려고 하여 담당 의사는 적어도 6개월 동안 목회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마우이섬을 담당한 하와이 선교부의 선교사인 엔젤 W. 길리스 목사는 그와 그의 가정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하와이 선교부 소속 목사와 교회에 당부했다.

박기홍이 하와이 선교부에 보낸 마지막 보고서에서 그가 6주 또는 8주 동안 목회할 수 있다고 적었지만, 담당 의사의 진단에 따라 폐결핵으로 쿨라 요양소에 입원하였으므로 박기홍은 1926년 2월에 호놀룰루 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한 하와이 연회에 출석하지 못했고, 건강 문제로 파송도 받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하와이 선교부 총무는 그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고, 일본인 도구지 고무라 목사는 하와이 선교부 소속 목사와 교회로부터 기금을 모아 박기홍에게 75달러를 보냈다. 하와이 연회는 박기홍을 대신하여 하와이에서 20여 년간 한인교회를 섬긴 임준호 목사 부부와 8명의 자녀를 마우이섬 구역 목사로 파송하였다. 

1927년 2월에 개최한 하와이 연회에서 하와이 선교부 감독 윌리엄 H. 프라이 목사가 1년 이상 결핵 요양소에서 요양한 박기홍이 건강을 회복하여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보고했고, 하와이 연회는 그를 그가 담임목사로 섬겼던 마우이섬의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했다. 그달에 임준호는 작년에 이어 마우이섬 한인 구역 목사로 파송을 받아 위의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1928년 2월에도 박기홍은 마우이섬의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 권사로 파송받아 섬겼다. 한 해 동안 하와이 선교부로부터 900달러를 보조받아 지난 1년간 275달러를 지출했고, 사택 임대비로 120달러를 지출했으며, 세계 봉사 기금으로 100달러를 헌금했다. 그는 1929년 2월에 이어 1930년 2월에도 본 교회의 권사로 파송받아 2,000달러에 해당한 예배당 건물과 대지를 관리했다. 1931년 2월에도 박기홍은 본 교회의 권사로 파송 받았다. 마우이섬 한인 구역에는 박기홍 이외에도 함호용, 강재우, 이환일, 문연찬, 김인경 등 7명의 권사가 있었다. 1932년 2월까지 1년간 어린이 18명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 3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5명의 세례교인이 이명하여 등록하였다.

1933년 이후 박기홍은 하와이 연회록에서 찾을 수 없으나 스프렉클스빌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을 것이다. 본 교회 이윤호 전도사는 표표한 청년이었는데 가훌누이 목재회사 사무원으로 근무하며 교회에 대한 일이라면 몸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물질로도 남에게 뒤지지 않았는데 청년은 별로 없고 대부분이 6, 70 넘은 노인뿐인데 이들을 섬겨 칭송이 자자했다. 수년 전에 공부하기 위하여 도미한 박기홍의 아들 제임스(원태)가 1934년 7월에 귀가하여 연로한 부친을 홀로 두고 다시 떠나기가 어려워 사업을 하면서 부친을 섬겼다. 아내를 여읜 후 박기홍은 65세가 되던 1940년에도 연봉 540달러를 받으며 마우이섬 스프렉클스빌에 있는 사탕수수밭에서 52주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야간작업을 하였다.

박기홍은 생일을 열하루 앞둔 1956년 8월 3일에 향년 84세에 마우이섬의 스프렉클스빌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호놀룰루에 있는 누아누 기념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2남 2녀 자녀인 제임스(원태), 피터, 헬렌 그리고 밀드러드는 아버지의 묘비에 ‘사랑하고 친절한 아버지’라고 새겼다.

amien.sohn@gmail.com

06.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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