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이우식(李雨植)은 1868년에 황해도 개성 대원에서 출생하여 부인 열례와 함께 1905년에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하였다. 1909년 5월에 노동계약에서 자유를 얻게 되자 그는 한인동포의 권리 확보를 지원했고, 1918년에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 산하 산다베 지방의 경찰원으로 활동했으며 2년 후 그곳에 지방회가 조직될 때 재무에 선임되었다.
1921년에 3월경에 남녀 동포와 함께 제 2고향인 멕시코를 떠나 그해 4월 초순에 쿠바 마나타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해 9월에 국민회 마나타 지방회가 조직될 때 그는 재무였다. 1923년 9월에 맛단사스 쿠바 민성국어학교가 개학했을 때 그가 이영환 등과 함께 찬성원으로 선출된 것으로 보아 맛단사스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맛단다스 지방회를 설립한 지 4개월이 되던 1921년 10월 5일에 이곳 까타자스 지역에 ‘한인예수교회’가 조직되었다. 이 교회는 감리교인과 안식교인이 자신들이 속한 교단을 주장하지 않은 한인 독립교회였으나 한인감리교회로 알려졌다.
이우식은 1923년 10월에 이흥식의 부인 병비를 후원했고, 그해 12월에 내지 수재 구제금을 냈으며, 이듬해 2월에는 서문경의 부인 병비를 기부하는 등 구제에 힘썼다. 그런데 이우식은 1924년 9월 17일에 부인이 별세하는 슬픔을 맞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그해 12월에 의무금을 납부하고 이듬해 2월에 기근 구제금을 내는 등 구제를 계속했다.
1924년에 말미라 B. 터커 여선교사가 한인 예수교회를 찾았다. 터커 여선교사는 1922년에 맛단사스의 중앙기독학원에 파송된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사였는데 1912년에 내한하여 1922년까지 한국에서 사역했으므로 한국어에 능통했다. 터커 선교사는 한인 동포를 사랑했고, 친절하게 한인교회를 섬겼다. 이듬해 2월에 미국인 선교사가 주례하여 한인 예수교회에서 부경조와 김용복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부인이 소천한 이듬해인 1925년 10월 15일 주일에 이우식에게 차녀 이다부대와 지방회 재무 윤유홍이 교회 권사 양춘명의 주례로 결혼하는 기쁨도 있었다. 이날 지방회 법무부는 신혼 문답식을 거행하고 스페인어로 번역된 혼인증서를 발급한 다음에 오후 2시에 예배당에서 월계화로 단장한 가운데 찬송과 기도가 있은 후 신랑신부와 주혼 증인에게 문답식을 거행하였다. 신랑 편에 주혼 임병일과 증인으로 장영기와 박창은이 섰고, 신부 편에 신부 아버지와 박후만나 부인과 김마리아 부인이 섰다. 이날 한인, 쿠바인과 중국인 등 약 160명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 후 오후 7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한인예수교회 전도사
1926년의 3월부터 쿠바 선교부는 매월 25달러씩 한인감리교회를 후원하였고, 터커 선교사를 본 교회 전도부인으로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였다. 이해 12월 5일에 지방회 신구임원 교체식이 있었을 때 신임 회장이 선서문을 낭독하였고, 회장이 성경에 손을 얹은 상태에서 이우식이 기도했다.
이우식의 아들 이원실과 딸 이노디와 다부대가 1928년 성탄절 이틀 전인 12월 23일에 아버지의 환갑잔치를 열었고, 사위 윤창배는 안팎 의복을, 박창운은 안경과 금지환과 은수저를 선물했다. 이날 신한민보는 이우식을 한인예수교회 전도사로 소개하였다. 그해에 그는 조선국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직업과 노동이 박약한 가운데 한인예수교회 발전이 없었는데 터커 선교사가 주선하여 인근 쿠바인 감리교회 목사와 여러 장로가 모인 가운데 1929년 10월 23일 수요일 하오 3시에 미국 감독이 장영기에게 목사안수를 거행하였고, 방경일, 차회관, 고창덕, 이덕일, 호근덕과 함께 이우식이 집사로 선출되었고 다음 달인 1929년 11월 8일에 한인예수교회는 한인감리교회가 되었다. 1929년 10월에 맛단사스 한인감리교회가 조직되던 때까지 이우식이 전도사로 활동했을 것인데 1926년 3월에 터커 여선교사가 전도부인으로 활동할 때부터라면 약 3년간으로 보인다.
1930년 이우식은 맛단사스 지방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했다. 그해 12월에 맛단사스 지방회에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개최할 때 그는 한국독립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사를 하였다. 이듬해 본 지방회 회장을 맡았고, 회장이던 1933년 5월 1일에 맛단사스 청년학원에서 원장 임천택의 사회로 순국의사 추도회가 있었을 때 그는 이세창과 서문경과 함께 추도사를 담당했다.
1933년 5월에 장영기 전도사와 터커 선교사 간에 불미스런 시비가 발생하여 터커 선교사가 전도부인직을 사면하자 장영기의 신망이 떨어졌고 선교부 연락까지 끊어졌다. 그러자 장영기는 맛단사스 한인 안식교회를 조직하고 그 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한인 감리교회 전도사
1933년 5월 이후에도 교회 명칭은 한인감리교회였다. 이우식이 전도사로 선임되었고, 그 외 총무 집사에 고창덕, 서기 집사에 태덕일 그리고 재무 집사에 이홍점이 선출되었다. 그해 12월에 맛단사스 지방회 임원 교체식에서 감리교회를 대표한 이우식이 안식교회를 대표한 장영기와 함께 축사를 담당했다.
1934년 11월 18일에 이우식 전도사의 아들인 32세의 이원실과 장성실의 딸인 23세의 장사라가 한인감리교회 예배당에서 양춘명의 주례로 결혼했다. 폐백이 있은 다음 고창덕의 기도, 주혼 편 이우식의 예사, 이세창과 박창운의 축사와 축배가 있었는데 그날 참석한 내외 빈객이 100여 명이었다. 이날 혼인잔치는 이우식의 딸 이마리아가 극력 주선하였다고 하는데 해금과 장고 및 소고 등 한국식 음률에 맞추어 장년과 청년 남녀가 무도회를 열었고, 이후 유성기에서 나오는 소리에 맞추어 무도회도 있었다. 이날 받은 선물 중에는 맛단사스 중앙기독교 감리교의 리드 미국 여선교사(맛단사스 고등보통학교 교장)의 찻잔 접시 4개와 큐리취 여사의 유리 항아리 1개와 잔 6개와 미겔뽕 씨의 신랑 구두 한 컬레와 신부를 위한 향수 1갑도 있었다. 그런데 결혼식 1주일 만에 한인 동포 차순재가 향년 64세로 익사하는 비보를 받았다.
1934년 성탄절 1주 전에 양희용 모친의 회갑잔치가 있었고, 이어서 성탄절에는 두 번의 큰 행사가 있었다. 리드 미국 여선교사가 교회음악대를 대동하고 한인촌에 이르러 12월 23일 저녁 7시에 성탄극을 연출했다. 리드 여선교사가 고문하고 박선녀가 지도하여 이유몽, 이홍점, 김순덕, 김복녀, 김보배, 이복선, 이경옥, 이복금, 주미엽, 이복희, 호갑순, 박동기, 주화엽, 박등흥, 박기순 등 청소년이 출연한 성탄극은 수십 명 청중에게 1934년 전 예수께서 탄생하셨던 것을 목도하는 감상을 새롭게 했다. 성탄극이 끝난 후 리드 여선교사는 아동들에게 준비한 유희품 등을 나누고 그날 9시에 마쳤다. 한인 교인들은 물론 동포들도 극진한 후의를 보여준 리드 여선교사에게 감사했다. 수전 위원 호근덕과 기념 준비위원 고창덕과 태덕일이 준비하여 12월 24일 밤에 예배당에서 이우식 전도사의 주례로 성탄절 예배를 드린 후 교인들에게 과자를 나누고 차와 주찬으로 참석한 동포들을 대접하였다. 교회 직원은 금번 성탄절에 총 15원 35전을 후원하신 여러분에게 감사했다.
1935년 1월 21일에 있었던 박창운의 생일잔치에 이우식 전도사가 참석하여 천도교 쿠바 종리원 장덕암과 함께 축사 순서를 하였다. 그즈음에 박창운 가정에서 딸을 낳은 기쁨도 있었는데 민성 국어학교 교사인 이세창은 감기로 고생을 하였다. 그해 2월에는 김석봉의 대상일이 있었다. 아내 쿠바인 히메네스와 아들 아린은 몇 주 전부터 준비하여 그달 21일 오후 7시 30분에 이우식 전도사를 모시고 대상 기념 예배를 드린 후 참석한 한인들에게 주찬과 차를 대접했다. 참석한 동포들을 대신하여 김성재가 감사와 치하를 아울러 말했다. 김의 부인과 아들은 20여 년 간 동거양육을 받았다하여 그가 별세한 후 거의 주일마다 그의 묘지를 방문하였고, 소상일에도 여러 동포를 청하여 기념하였으며 이번에는 화환 두 개를 분묘에 가져다 놓았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동포들은 모범할 만한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유카탄에서 쿠바로 이주, 한인예수(감리)교회 전도사로 재직
조선국어사전편찬회 발기인, 맛단사스 지방회 회장 등 역임
그해 4월 28일에 지방회 부회장 차희관의 외아들 흥재의 첫돌 잔치가 있었다. 연필, 쌀, 국수, 총, 책, 대초 등을 순서로 집게 하는 놀이를 한 후 차희관의 예사에 이어 이우식 전도사의 기도가 있었다. 이세창과 임진택과 서문경의 식사를 마친 후 쿠바의 아동 유희극인 삐나따로 여러 아이가 재미있게 놀았다. 그해 5월 1일에 지방회관에서 순국선현 추도식이 있었을 때 지방회장 박두현의 개회사에 이어 애국가 제장과 국기와 민기 경례가 있은 후 이우식의 기도가 있었다. 그해 8월 29일 저녁에 국치 기념식을 하였는데 이우식은 애국가 제장과 국기경례에 이어 기도하였다. 그해 11월 22일에 이우식 전도사가 갈데나를 심방했다. 만 2삭 동안 병환에 있던 사위 되는 윤창배를 위문하고 난 뒤 하루 밤을 지나면서 인근 동포들을 심방한 후 이튿날 맛단사스로 돌아왔다.
1937년 10월에 신한민보에 게재된 교회 주소는 맛단사스의 사서함 273번과 갈데나스 사서함 2867이었는데 한인감리교회와 한인안식교회 주소일 것이다. 그해 12월 24일 밤에 이우식 전도사의 주례로 성탄예배가 있었다. 이복희 등이 ‘오! 산디시모’와 ‘어린이들 찬송하라’로 시작되는 찬송가 65장을 불렀고, 박동홍 등이 성경구절을 낭독하였으며, 박동기 등이 시편을 낭독하고 찬미하였고, 김보배가 성경을 강독하였으며, 김경옥 등이 찬미하였고, 이복선 등이 성경을 강독하였고, 찬송가 212장과 ‘벨리따스’와 ‘목자들 오너라’ 등을 불렀으며, 이거복 등 두 소년이 동방박사가 되어 연극한 성탄극에서 수십 여 명의 청중이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고 이홍점과 이경옥의 ‘지나 공주’와, 김순덕과 김보배의 ‘단지’, 장천회의 시, 임경옥의 ‘곤데시따,’ 김보배의 시, 김순덕 등의 ‘아바닛갈,’ ‘무네기따,’ ‘굿나잇’ 등의 시 강독과 연극 등은 성탄절에 이채를 더 하였다. 밤이 늦은 가운데 주찬과 다과를 나누었고, 박창운이 제공한 돼지 지짐과 독주와 포도주의 향기는 좋았으며, 어린이들은 교회가 준비한 과자를 나누며 좋아했다. 이우식의 전도사직은 1937년 말로 보인다. 이듬해부터 양춘명이 공식 석상에서 기도를 하는 등 교회를 대표하여 활동하기 때문이다.
이우식은 자부 김옥순이 1943년 6월 8일에 사랑하는 남편 이원실과 일곱 살 된 아들을 두고 향년 31세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인 1944년 10월에 맛단사스 한인 감리교회의 양춘명 전도사가 소천하는 슬픔을 맞는다. 양춘명 전도사의 소천으로 이우식이 다시 전도사로 재직하게 되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증한다. 다음 달 11월 17일에 아침부터 동 지방 회관에 반기를 단 가운데 연합순국선열 기념식이 있었고, 교회를 대표한 이우식이 고창덕, 장영기, 서문경과 함께 기념사를 하였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1944년 12월에 맛단사스에는 남자 73명과 여자 57명으로 130명이 거주했고, 학생으로는 중학생 1명과 소학생 24명이 있었으며, 대부분 노동하였으나 박선봉과 박선환 형제는 폐물 상점을 경영했고, 현미숙, 박선녀, 이산호, 임경옥은 필목 소매 겸 재봉업에 종사했으며, 박창운과 임병일은 노동 주무원이었다. 이듬해 12월 27일자 신한민보의 맛단사스 지방회 보고에서 이우식 등 8명이 맛단사스 지방회 명예회원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는 1948년의 성탄절인 12월 25일에 향년 80세에 소천했다. 2011년에 한국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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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