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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양춘명(1872-1944)

손동원 목사

(미드웨스트대학교 교수)

양춘명(梁春明)은 1872년경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5년에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 갔다가 노동계약이 끝나면서 어려운 생활에 살길을 찾아 1921년 3월경에 쿠바로 이주하였다. 그해 4월에 마나티 지방에 도착하자 에네켄 농장에서 노동하였다. 그가 마나티 지방에 도착한지 5개월이 되던 그해 9월에 국민회 마나티 지방회가 조직되면서 양춘명은 회장에 선임되었다. 얼마 후 양춘명은 동포 여러 명과 함께 맛단사스 만이 내려다보이는 엘 볼로 농장으로 이주했다. 그해 10월 5일에 맛단사스에서 교파를 따지지 않고 감리교인과 안식교인이 함께 모여 한인예수교회를 조직했을 때 그도 함께했다. 

맛단사스에 쿠바 지방회가 1923년에 설립되었을 때 양춘명은 쿠바 지방회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본 지방회가 신한민보에 이듬해 1월에 발표한 한인 인구조사에 따르면 한인 남자가 34명이었고, 한국 부인이 11명이었으며, 한인 남자가 결혼한 멕시코 부인이 4명이었는데 한국 부인이 낳은 소년이 15명이었고 소녀가 11명이었으며, 멕시코 부인이 낳은 소년이 2명이었고 소녀가 4명이었다. 한인 남자의 대부분은 노동자였고, 이중 김치일만 식물 상점을 소유했다. 그해 3명이 태어났지만 3명이 사망하였으며, 입경 동포와 환국 동포가 각각 한 명이 있었다. 

한국에서 10여 년 동안 선교하였던 미국 북감리교 여자 선교사였던 벨 터거 여선교사가 1924년에 쿠바 맛단사스 중앙기독학원에 파송되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터커 여선교사는 한인 동포를 사랑하고 도우며 한인예수교회 사역에 도움을 주었다. 

그해 2월 10일 오전 9시에 한인예수교회 예배당에서 양춘명이 사회한 가운데 그곳 백인 감리교회 목사를 청하여 유아세례식을 거행했다. 양춘명이 집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해 삼일절 기념식에서 교회대표로 승석하였고, 일동이 ‘동해물과’로 시작되는 애국가를 제창한 후에 기도했다. 맛단사스 지방회 법무원이기도 했던 양춘명이 그날 헌법 낭독과 본국 역사 진술과 대표 예사까지 맡았다. 

1925년 10월 25일 주일에 지방회 재무 윤유홍과 이우식의 둘째 딸 이다부대가 결혼했다. 지방회 법무부에서 신혼 문답식을 거행하고 스페인어로 번역된 혼인증서를 발급받은 뒤인 하오 2시에 한인예수교회 예배당에서 권사 양춘명의 주례 하에 찬송가와 기도가 있은 후 신랑 신부와 주혼 증인에게 문답식을 거행하였다. 권사로 소개된 점으로 보아 권사활동을 맡은 집사임을 알게 된다. 그 결혼식에 한인과 쿠바인과 중국인 등 약 1백60명이 모였고, 신랑은 자택에서 서양식과 한국식으로 진수성찬을 베풀었다.

1927년 3월 1일 하오 8시에 지방회 총무 임천택의 개회로 삼일절 제8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이날도 양춘명은 권사로 소개됐다. 이날 기념식에서 양춘명은 기도와 본국 지지 진술의 순서를 맡았다. 그해 한인들의 생활이 곤란하여 문을 닫았던 민성국어학교가 그해 6월에 다시 개학하기로 하고 중학교의 임원을 선정했다. 양춘명은 영어과 교장에 선출되었다. 기타 임원으로는 한국어과에 교장 김덕순, 교사 임천택, 간사 고창덕이 있었고, 영어과에 교사 터커 여선교사와 조교사 임천택이 있었다. 그해 9월 신한민보에는 맛단사스에 “(한인)예수교회가 있어서 영혼 상 구원도 수양한다더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달에 지방회 평의원 윤창배에게 아들이 태어났고, 재무 임천택에게 딸이 출생했으니 한인예수교회에서도 경사였다. 그런데 지방회 평의원 서문경이 우연히 철사못에 찔려 입원 치료하여 본 지방회는 구제금으로 7원을 주었는데 권사였던 양춘명이 심방했을 것이다. 

그달에 신한민보는 양춘명을 한인예수교회 간사로 소개하면서 결기부족증과 기침으로 입원하였다고 보도했다. 이 간사직이 집사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 달 10월에 민성학교 영어과 교장직을 사면했던 것으로 보아 건강이 위태로웠던 것 같다. 그러나 그달에 주한옥이 득남하여 기쁜 소식을 접했는데, 본 지방회 총무 겸 서기였던 임천택이 신경쇠약증으로 입원하려 했으나 만원이어서 자택에서 치료한다는 보도에 우울했다. 그해 성탄절에 양춘명의 주례로 신실한 교인이었던 차희관과 이엣슬별의 결혼식이 있었다. 맛단사스 통신이 신한민보에 기고한 기고문에 따르면 “한인사회에서는... 혼례를 하게 되면 국민회에 청원하여 혼인증명서를 요구하는 전례가 있었으나 이번 혼인에는 교회 혼례식을... 중대히 여겨 하나님의 뜻대로 혼인하는 것을 존중히 알아 권사 양춘명 앞에서 신중한 문답을 할 때 신랑신부의 굳은 믿음이 언사에 나타나 일반 교우와 쿠바 사람과 남녀 40여 명이 탄복함을 마지않았다. 찬송가 256장을 부르고 양 권사의 간단한 기도가 있은 후 성경을 낭독할 때 하나님께서 이 세상 남녀는 내신 사적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맹약한 후에 사람의 뜻대로 마음을 변치 못한다는 뜻을 설명한 후에 신랑이 예비한 지환(반지)을 신부의 손에 끼울 때에 신랑의 우악한 손으로 신부의 섬섬옥수를 잔뜩 움 잡고 무명지에 끼울 때에 신부는 이날 모은 빈객을 접대할 준비를 하느라고 일을 많이 한 고로 손에 피가 내렸는지 손가락이 통통하여 지환이 잘 들어가지 않으니 신부는 아픈 것을 참노라고 곱게 단장한 홍안을 찌푸렸다. 주례자의 명령으로 신랑신부가 입을 맞추라고 한즉 사랑이 넘친 신혼남녀 두 분이 어느 듯 ‘쪽!’하는 소리는 일반 청중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하였다. 이어 찬송가 257장으로 합창한 후에 식을 피했다더라.” 

노동 공황이 심각한 1929년, 맛단사스에 한인 40명 내외에 남녀 아동을 합하여 120명이 거주했으며, 한 주일 노동 값이 150원 정도였다. 한인예수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지 8년이 되던 그해 10월 23일에 터커 선교사의 주선으로 맛단사스 한인감리교회가 조직되었다. 장영기가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집사로 방경일, 이우식, 차희관, 고창덕, 태덕일, 호근덕을 선임했다. 그 후 양춘명이 성경 가르치는 집사로 선출되었다. ‘양춘명이 처음으로 성경을 강도하는데 목사 장영기가 강도상 상층으로 올라와 강도하라하여 올라가 강도하였는데 터커 선교사가 강도상 상층에는 목사의 좌석이므로 집사들이 올라가 강도하는 것이 불가하다며 다음부터는 내려가 강도하라고 말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면청원을 제출하고, 교회집사 중 마귀가 있어서 목사를 미혹케 하여 죄를 짓게 한다는 자긍자만의 언사로 터커 선교사와 교인들이 분개하며 제명할 뜻까지 있었다.’  

1930년 4월, 장영기 목사의 모친 회갑연이 있었고, 이듬해 7월에는 장영기 목사 가정에 득남하여 기쁨이 계속 이어졌다. 1933년 5월에 장영기 전도사와 터커 여선교사 간에 불미스러운 시비가 발생하여 터커 여선교사가 사면하고 장영기 목사는 맛단사스 한인 안식교회를 조직하고 안식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

 

1933년 5월 이후 교회지도자가 떠나는 적지 않은 파란과 곡절을 겪으면서 한인감리교회는 미국교회의 도움 없이 완전히 한인의 자치교회가 되었다. 이우식이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선임되었으며, 총무집사에 고창덕, 서기집사에 태덕일 그리고 재무집사에 이홍점이 선출되었다. 이후 양춘명은 직분을 맡지 않은 교인이었다. 양춘명이 1936년 9월에 늑막염으로 의사와 병원을 찾았는데 이듬해 2월에도 완치되지 못했다. 그해 4월 그를 찾은 신한민보 기자에게 여러 달에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동포들에게 감사하는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해 5월에는 고창덕이 양춘명의 한 달 식료품을 공급하였고, 지방회 구제부도 재차 특연금을 모아 양춘명의 병원비를 도왔다.

1938년 새해부터 양춘명이 한인감리교회 전도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1월에 이승준의 장남 이병호의 생일과 마지막 아들 항복의 첫돌을 맞아 잔치를 열었다. 이날 양춘명의 축사가 있은 다음에 준비한 음식을 베풀어 즐겁게 보냈다. 그해 삼일절 기념식에서 양춘명이 기도순서를 맡았으며, 그달에 있었던 안창호 선생 추도회에서 기도와, 고창덕과 조덕중과 이세창과 함께 ‘안도산 선생의 사업을 잇자’는 연설과 위령 기도까지 했다. 그해 성탄축하식에서 특별순서로 성경역사극이 있었는데 출연한 김보배, 김순덕, 이선실, 박선녀, 임경옥, 주미엽, 주화엽, 호갑순, 박동기, 박동흥, 임상옥, 호갑년, 권옥희, 박기순, 주근엽, 주희엽, 이봉태, 임봉만 등이 한인감리교회 교인이었다. 

1939년 2월에 국민회 30주년 기념식에서 양춘명은 기도했다. 이듬해 성탄절은 양춘명 전도사의 사회로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아동과 부인들에게 과자를 나누었고, 동포들에게 다과로 접대하였다. 1941년에 양춘명은 한인감리교회 전도사였다. 집사로는 이우식, 고창덕, 호근덕이 있었으며, 남녀 20여 명이 예배를 드렸다. 그해 8월 29일에 국치기념식이 있었을 때 양춘명이 기도순서를 맡았고, 사회 봉사담을 나누었다. 대한여자애국단 서기 임경옥의 생일잔치와 김명구의 딸 첫돌잔치가 있었던 그해 3월에 한인들이 노동하던 농장이 갑자기 노동정지를 선포하여 한인의 생사에 문제가 된 가운데서도 그해 9월에 52일 동안 일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갈데나스 동포들을 위해 14원 30전을 특별헌금을 할 때 양춘명도 20전을 기부했다. 대한여자애국단 서기와 재무이자 한인감리교회의 신진 인물로 떠오른 임경옥과 박선녀가 성탄절에 성탄극과 취미극을 연출하였다.

1942년 삼일절에서 양춘명은 기도했고, 그해 4월에 두 아들 이병호와 이거북의 주선으로 이승준의 회갑연이 있어 양춘명이 식사와 축수의 예사를 담당했다. 그해 8월에 맛단사스 지방회는 대한 여자애국단과 함께 829 현기식을 하였는데 이날 민성국어학교 학생들의 무궁화가의 찬미가 있은 다음에 양춘명이 기도하였고, 이산호와 호갑년과 함께 양춘명이 연설도 했다. 그해 12월에 김봉재 아들의 첫돌 잔치가 있었고,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나 아들 형제를 데리고 이주한 이윤근이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나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양춘명이 심방했을 것이다. 그달에 있은 대일선전 1주년 기념식에서 양춘명이 기도했고, 이승택과 서문경과 장영기와 함께 그도 기념사를 연설했다. 그해 12월 24일 밤에 양춘명 전도사의 사회로 성탄예배를 드렸고, 저녁에는 임경옥과 주미엽이 성탄극과 취미극을 연출하여 만장 관객에게 흥미를 주었고,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고, 주찬으로 동포를 접대하였다. 성탄 경비를 위하여 여러분이 낸 의연은 총 13원 20전이었다. 

1943년의 새해에 박희성의 2세 된 여아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은 다음 달 1일에 국민회 창립 제33년 기념식에서 양춘명은 서문경과 고창덕과 함께 연설했고, 삼일절 기념식에서 양춘명이 기도순서를 맡았다. 그해 12월에 맛단사스 지방회는 병환 중인 장윤익과 함께 양춘명에게 지방회 회원 전부가 매 두 주일에 5전씩 출연하여 연명하도록 하였는데 그달 24일 밤에 양춘명 전도사의 사회로 성탄절 예배를 드린 후 이신실의 지도로 20여 명의 소년과 소녀가 성극을 연출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양춘명은 1944년 5월 말에 공립병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고 8월 초에 퇴원하였으나 병세가 더욱 위중하여 재차 입원하며 고통이 심했다. 맛단사스 지방회가 주최하여 순국선열 기념식을 한 지 이틀 후에 1944년 10월 19일 새벽 4시에 72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조국의 해방을 10개월 앞둔 때였다. 그가 남기고 간 물건을 판값 7원 75전과 지방회 회원 1인당 1원씩 특별 기부하여 그의 장례비 39원 75전을 마련하였다. 2020년 한국정부는 그의 독립유공을 인정하여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damien.sohn@gmail.com

10.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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