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레드랜드의 최초 한인 목회자는 이W.K.이다. 1910년 인구조사에 나오는 Won Kang Lee(이원양)가 그라면 그는 1886년에 한국에서 태어나 1904년에 도미하였는데 기혼자로서 1910년 현재, 레드랜드에 있던 호텔 식당에서 빵을 굽는 제과사였다.
레드랜드
로스앤젤레스에서 10번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운전하면서 포모나를 지나고 남쪽에 리버사이드를 두고 계속 운전해가면 레드랜드가 나오는데 리버사이드와는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다. 노동주선인 안석중이 1905년에 이미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한인들이 늦어도 1905년부터 거주했을 것이다. LA타임스 1910년 4월 26일자에 따르면 1910년 4월 25일 국민회 건물을 포함한 8개 건물이 소실되어 무려 5000불의 손실이 있었다고 한다. 자전거를 건지려다가 머리와 팔에 화상을 입는가 하면 뛰어내리다 발목을 다치는 등 원인 불명의 화재가 나던 때까지 한인들은 레드랜드의 서쪽 끝에 모여 살았는데 현재 10번 하이웨이 북쪽이 된다.
선우학원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이 비교적 많이 살던 곳이 레드랜드였고, 약 3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와 오크랜드에 5, 6명 정도, 나성에 약 100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한인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증할 수 있는 것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이 1907년에 이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7년 6월 11일의 레드렌즈 우체국 인장이 찍힌 엽서에는 ‘미국행 안창호 본집’이라 쓰고 Mrs. C. H. Aun P. O. Box 448 Redlands, Cal, USA라고 적혀있고, 1907년 6월 16일의 레드렌즈 우체국 인장이 찍힌 엽서에는 '안창호 본가'라고 쓰고 Mrs. H. L Aun, P. O. Box 448 Redlands, Cal, U.S.A. 라고 적혀 있다. 이곳에는 1905년 12월경에 공립협회 레드랜드 지부가 설치되었음으로 상당한 한인들이 거주하였을 것이다. 1906년 신한민보에 게재된 노동주선인의 광고에서 당시 한인 노동현장의 경제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렌지 스트리트 105번지(105 Orange street)에 사무소를 개설한 한인권업소 주인 오운이 귤과 딸기 따는 일이 매삭 5, 60원이라고 광고하고 있다. 한 달 급여가 곡상의 경우 30원에서 50원이고, 접시 닦는 일이 25원에서 35원이고, 스쿨 보이가 2원에서 3원50전이었다.
레드랜드제일감리교회 역사책에 따르면 한인들은 과일 따는 일뿐만 아니라 호텔이나 식당에서 일하기도 하고 집일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미국화폐단위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조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던 탓인지 달러대신 원으로 센트 대신 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일 수도 있고 미국생활 적응이 쉽지 않다는 고백일 수도 있겠다. 1912년에는 한인 노동 주선소가 실베르리아 스트리트 201번지(201 Sylveria Street)에 있었는데, 1917년에도 한인 장C.K.가 웨스트 스테이트 스트리트 314번지(314 W. State Street)에 한인노동주선소를 개설하고 이곳 레드랜드 한인촌을 지키고 있었다.
유니온 한인교회
1907년에 발간된 레드랜드 전화번호부는 이W.K.를 유니온한인교회 Union Korean Mission 선교사로 소개하고 있다. 미션이라고 함은 예배 처소로서 교회가 되기 전 단계의 조직을 일컫지만 여기서는 일단 교회라고 쓰기로 한다. 그런데 선교사 이W.K는 본 교회 건물에서 거주하고 있다. 위의 전화번호부에서 ‘선교사’(missionary) 다음에 나오는 ‘r'은 거주지 residence라는 의미이다. 1907년의 전화번호부가 1906년에 자료를 수집하여 출판해야 함으로 유니온한인교회는 아무리 늦어도 1906년에 세워졌다고 보아야 한다.
1908년 지도에는 유니온 한인교회가 있었던 오랜지 스트리트 510번지의 건물이 보인다. 유니온한인교회 예배당은 오렌지 스트리트 510번지에 세워지고 있는데 현재 이곳에는 상점들이 몰려 있어 레드랜드 상업의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다. 유니온 길과 이스트 스투알트 길이 만나는 사거리에서 거리표지판이 보이도록 넓게 사진을 한 장 찍을 경우 당시 한인교회는 사진 중심에 있어야 할 것이다. 왜 교회이름을 유니온한인교회라고 했을까? 이 대답을 찾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상항장로교회에서 1908년 12월에 발간한 잡지 ‘대도’가 그 해답을 주고 있다. 그대로를 싣는다.
“레드랜드에는 한인이 자유로 교회를 설립한 곳인데 열어 교우가 열심히 연조하야 각색 경비를 담임하야 지낸다하니 과연 본받을 만한 교회더라.”
위의 기사에서 유니온한인교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첫째는 레드랜드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자유로’교회를 설립하고 있다. 말하자면 장로교회와 침례교회, 그리고 감리교회가 함께 어우르는 교회 곧 유니온교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장로교회가 유니온한인교회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미국장로회 총회록에 잘 나타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와 엎랜드, 리버사이드, 락 스프링, 레드랜드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 대한 선교가 로스앤젤레스 근교에서 안식년을 지나고 있는 주한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 사무엘 마펫 박사에 의해서 제기되었고 방화중 전도사는 이미 이러한 곳을 방문하였는데 이때가 1906년이었다. 미국 북장로교회는 1907년 가을에 방화중 전도사를 한인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중국인의 선교를 목적한 존 H. 라프린 목사가 지도하고 마펫 선교사가 안식년 기간만 방화중 전도사를 보조하기로 하였다. 위의 라프린 목사는 전 중국선교사였다. 바로 이 한인교회가 유니온한인교회라고 본다. 그리고 이W.K 목사는 방화중 전도사가 지명한 평신도 목회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인 레드랜드침례교회도 한인선교에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인 교회 제일감리교회 100년사를 쓴 래치 비딕이 침례교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인 노동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레드랜드로 유입되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처음에 중국인을 추방하였고, 이 후 일본인을 추방하였고 그리고 인도사람을 추방한 후가 된다. 그러나 몇몇 교회들이, 특별히 침례교회가, 이들 다양한 인종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선교적 노력을 통하여 접근하려고 노력했다.”위의 미국인 제일감리교회가 유니온한인교회에 관여하였다고 보는 시각은 그 후 북미자지한인야소교회가 조직됨으로써 확실하다. 유니온한인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교우가 열심히 연조하야 각 색 경비를 담임하야 지낸다하니 과연 본받을 만한 교회더라”고 쓴 글에서 볼 수 있다. 유니온한인교회는 교인들이 스스로 마음을 합하여 헌금을 하였고 교회에서 필요한 다양한 경비를 스스로 담당했다. 미국 교회가 조선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실시했고 성공적으로 열매를 거두었던 삼자운동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1906년에 촬영한 레드랜드 감리교 한인 예배처소의 30명의 한인들이 대부분 유니온한인교회의 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이 중에 유니온한인교회 선교사였던 이W.K도 있을 것이다.
과연 유니온한인교회는 얼마동안 지속되었을까? 북미자지한인야소교회가 1906년에 시작했다면 아마도 1년도 채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W.K 목사도 1년 이하 동안 교회를 섬겼을 것으로 보인다. 잠깐 있다가 없어진 교회지만 본 교회는 이후 북미자지한인야소교회로 이어지고 한인장로교회로까지 계속 된다. 이W.K 선교사는 1907년 레드랜드 전화번호부에 소개된 이후 그를 찾기란 쉽지 않다. damien.soh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