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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한인 노동자 이야기

이정현 목사

Q: 목사님, 저도 하와이에 살다가 왔습니다. 한인 최초 이민자가 120년 전에 하와이로 왔다고 하는데 그들이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상황과 이후의 한인 이민자의 삶을 알고 싶습니다.

- 실비치에서 홍장로

A: 한인 최초의 이민자는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 노동 이민자들이 겔릭호를 타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처음 도착했습니다. 1621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찾아온 영국 청교도들의 숫자와 같은 숫자입니다. 한국 청교도의 발걸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후로 1903-1905년까지 7,000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하와이에 왔는데 남자들만 왔기 때문에 결혼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박희민 목사의 ‘이전보다 큰 영광’이란 설교집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국 여성 혹은 일본 여성들과 결혼하기도 하였는데 언어와 문화가 달라 거의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소위 사진 신부(Picture Brides) 말이 생겨났습니다. 남자들이 사진을 한국에 보내면 그 사진을 보고 신부가 되겠다고 여자들이 하와이로 와서 결혼하는 것입니다. 사진 한 장만 믿고 왔다가 실제로 남자를 만나보니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사진 속의 남자는 분명히 젊은데 실제로는 할아버지만큼이나 늙은 얼굴을 보고 실망한 여자가 배에서 내리지 않고 버티는 일도 있었고 결혼을 거부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여자들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한인 노동자들은 하루 67센트의 임금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해서 한국계 미국인의 수입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 한 가정당 연 수입이 1,800달러로 1,400달러인 일본인과 중국인 1,600달러인 백인보다 더 높아졌습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밭에는 일본인 노동자가 6만명이나 되어 그들이 노동을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들이 파업이라도 하면 농장 주인은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 노동자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한국인 노동자들을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905년까지 7,000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들어 왔는데 한국이 일본에 합병되자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결국 하와이 이민이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초기에 노동 이민자로 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교사들이 이민을 주선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민 오자마자 예배 처소를 만들고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를 하며 친교를 나누고 향수를 달래었습니다. 그래서 한 때 하와이에는 39개의 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1903년 11월 10일 공식적으로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가 세워졌습니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이민자들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열심히 지원했는데 이때 박용만과 이승만 박사가 의형제를 맺고 국민회를 조직하여 이민자들 1인당 5달러씩 내었다고 합니다. 5달러씩 7,000명이면 3만5천달러로 그 당시의 이 돈은 엄청나게 많은 돈이었습니다. 1920-30년대에 접어들자 하와이 농장을 떠나 캘리포니아 본토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로스엔젤레스, 리버사이드, 엽랜드, 리들리,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중심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한인 이민자들은 이때 벌써 사병순을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한인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광복을 위해 지원하는 데 앞장을 섰고 독립 외교를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교포 사회의 구성원은 노동자들과 유학생들이었습니다. 

09.0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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