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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장애인의 구원은 가능한가? (상)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가르쳤던 구원의 과정은 먼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 그 전파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 다음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 전파된 복음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 의미조차 깨닫지 못하는 지적 장애인이나 유아(幼兒)는 그 구원의 과정에서 제외된다. 복음을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믿는 것도 그 내용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공평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지적장애인에게 어떤 기회도 주시지 않고 지옥으로 직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과 모순이 된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분명 지적장애인을 위한 특별한 계획과 방법을 마련하셨을 것이다.

물론 무조건 다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지적 장애인의 구원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문제와 뗄 수 없다. 공평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에게 지적 장애인은 어떤 존재로 비쳐지겠는가? 분명 그들의 구원을 원천적으로 차단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행위적 능력에 의존하는 율법적 의가 아니다. 앞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말씀한다(롬3:21).

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말씀을 지적 장애인들에게 적용되지 않지 않는가?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인지할 수 없으니 예수를 믿을 수 없고 따라서 “모든 믿는 자”에게 제외되어야 하는가? 만약에 21절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인지적 차원의 믿음이라고 하면 ”차별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차별이 없다는 말씀은 인지적 능력이 있고 그 능력에 따른 믿음이 있는 사람에 한해서 차별이 없다는 말씀일수는 없다. 이렇게 한정을 짓는 것 자체가 이미 차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는 말씀에서 “모든 사람”속에 지적 장애인들이 제외되는가? 지적 장애인이나 유아나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10절에 선언하고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말씀한다. 지적 장애인들도 의인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지적 장애인들이 죄인으로 정죄 되는데 하나님의 의는 이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차별 없느니라”는 말씀은 진리가 되지 못한다.

지적 장애인들도 마찬가지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처별 없이 지적 장애인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지적 장애인들의 지적 능력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정죄 되었는데 지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나님의의가 미치지 않는다면 “차별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공평한 말씀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지적 장애인에게 차별 없이 하나님의 의가 미치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옙1:11에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말씀한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는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이 뜻 하신 바 가장 지혜롭게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자유롭게 그리고 변치 않게 예정해 놓으셨다”라고 서술한다. 단순히 구원에 관한 것만 아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은 그의 예정하신대로 행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 역시 당연히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 심리적 상태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인간의 영적, 지적, 의지적, 심리적 상태는 구원을 결정하는 요소(determinative)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반응적(responsive)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적장애인의 지적상태와 구원의 관계는 결정적 차원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적 차원에서 논해야 한다. 그리고 반응적 차원은 구원을 무효화시키거나 취소하는 차원이 아니며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일정하고 보편적인 모습을 기대할 필요는 없는 차원이다.

신1:39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 자녀들’과 욘4:11에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는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라는 말씀에서 ‘분변하다’는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다. 즉 ‘안다’는 뜻이다. 어린 유아를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자’, 혹은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지적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특별히 구원에 있어서 바울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소위 ‘행위’이다. 행위라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행동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인간의 능력내지는 공로를 의미한다. 그 행위의 반대가 바로 은혜이다. 은혜는 인간의 그 무엇도 개입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 주어짐을 의미한다.

롬11:6에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은 인간이 지적 공로, 정신적 공로, 의지적 공로, 행동적 공로, 영적 공로 등이 구원에 개입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적 장애인이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는 일이다. 단지 지적으로 모자라지만 봐준다는 식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어떤 요소도 개입되면 은혜가 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의 은혜이다. 지적 능력이 구원의 결정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지적 장애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 특성을 더 확실하게 부각시킨다.

이렇듯이 구원의 결정은 인간의 상태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이루어진다. 어미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는 지적 능력, 의지적 동의, 도덕적 판단은 기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사49:1, 렘1:5, 갈1:15). 하나님의 구원에 인간의 능력이나 역할이 개입될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필자주] 본 논문에서의 연구 대상인 ‘지적 장애인’은 성경 지식이나 복음에 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지적 능력이 없는 제 1급 지적장애인을 의미한다.

sastel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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