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가장 아름다운 소식

고흐와 카라바조의 그림들을 보고

삶은 우리에게 벅차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세상의 정의와 상식을 바로 세운다는 목적 아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은 저 뒤로 밀려나 있는 듯 보이지만, 아름다움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고 삶 속에서 끊임없이 그분을 인식하고 경외하는 삶, 길과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요 14:6)께서 부여하신 구원의 나라를 느끼며 사는 삶, 그래서 사랑이라는 의미를 누리고 추구하는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올 겨울 전시회를 통해 두 명의 거장을 만났다. 고흐(Vincent van Gogh)와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n)의 원작들을 감상하고 나니, 이성과 논리의 싸움에 지친 내 안의 상상력이 치유를 받는 듯했다. 다른 시대, 다른 화풍의 둘이 가진 공통점 중 하나는, 우리가 지나치는 보통의 사람들과 그의 행동들을 아름답게 보았다는 것이다. 고흐는 의자에 앉아 슬픔에 잠긴 노인의 모습에서, 하루 종일 감자를 캐고 소박한 마음과 흙 묻은 손으로 감자를 쪄서 먹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일상에서 만난 소박한 여인의 모습에서 사소함과 하찮음이 아닌 아름다움을 보았다. 카라바조 또한 성화를 의뢰받으면 일상에서 거리에서 만난 실제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모델로 성녀 마리아를, 로마의 군인들을, 소년 다윗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려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인물로 유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일반 사람들의 기준에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과 행동에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었다.

내 인생에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27개월이 된 딸과 나는 시댁에 남고, 남편이 면회도 가기 어려운 지역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을 시절, 예배가 안식임을 처절하게 깨달았던 시절의 한 장면이다. 매일 혼자 드리는 철야예배가 부족해서 집 앞 교회의 모든 예배에 참석했는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황량한 수요일 저녁에 수요예배를 드리려고 가장 구석진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광경은, 나와 조금 떨어져 기도하며 앉아 있는 초라한 행색의 나이 많으신 여자분의 옆모습이었다. 비 맞은 싸구려 검은 패딩에 손질되지 않은 머리와 급하게 나온 듯한 허름한 신발, 마치 나는 이 영광스러운 예배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두려움과 떨림이 느껴지는 몸짓으로 기도하는 모습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전능자 앞에 엎드린 겸손한 마음이 보인 적은 처음이었고, 그 아름다움의 깊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환영 받거나 칭찬받지 못할 것 같은 외양의 사람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신비함이 마음 깊이 남아 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에는 내면과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때로 매우 깊다. 고흐가 그린 석양의 버드나무, 화병에 꽃인 들꽃들, 양파가 담긴 접시, 감자 먹는 사람의 주름진 얼굴 이면에는 보여지는 그림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반대로는 고흐 자신의 자화상은 내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이처럼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때로는 내면을 가리기도 하고 때로는 더 자세히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이 양면의 분별과 내면의 깊이에 대한 상상이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필요한 일이다. 이 훈련이 되어 있으면 마더 테레사의 주름진 얼굴 사진이 화려한 곡선의 여배우의 화보보다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

귀한 것은 늘 숨겨져 있다. 성경 속 예수님의 외모 또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사 53:2)이 없었다. 그는 실제로 “종”으로 묘사된다.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사 61:1; 벧전 2:9)은 그의 외모와는 상관이 없었으며, 그가 이 땅에서 받은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 처형이라는 결과를 생각할 때 아름다움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삶을 아름다움의 근거로 제시한다.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한 사람의 일생이 어떻게 ‘가장 아름다운 소식’이 될 수 있는가? 이는 우리가 익숙해 있는 종류의 아름다움은 확실히 아니다. 아름다움의 사전적인 정의를 거스를 뿐 아니라, 아름다움과는 대조되는 것을 아름답다고 우기고 있는 느낌까지 들게 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이것이 신학적 미학의 시작이다.

이 아름다움의 독특한 점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계시한다는 것이다. 마치 빛의 존재가 온갖 색깔을 구분해서 인식하게 하듯이, 아름다움의 본질은 누구에게 평가 받거나 정의되거나 판단되어지지 않고 그저 세상을 비추는 빛과 같다.  이것은 철저히 보이는 세계 속의 물리적 법칙 안에서 사유하고 인간의 통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고흐나 카라바조와 같은 위대한 화가들은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그림에 투영했는데, 그들이 그린 그림의 또 다른 공통점은 빛의 역할을 소망 없는 인생을 비추는 절대적인 계시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카라바조는 어둠과 빛의 강한 대조를 사용해 장면을 연출하는 테네브리즘 기법의 창시자로 유명하다. 줄리오 만치니의 표현을 빌려, 그의 그림은 마치 검정으로 도배된 방안으로 단 하나의 창문을 통해서 빛이 유입되는 것을 보여준다. 고흐에게도 빛은 그림의 조연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1885) 위에 비친 작은 호롱불의 존재는 그들에게 유일한 소망인 구원자를 뜻한다. 그에게 빛의 움직임은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었으며, “언젠가 가장 어두운 밤도 끝이 나고 해가 떠오를 것이다”라고 고백했다.

이들의 그림처럼, 계시되는 빛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은 낮은 곳에서 캄캄한 어두움 속에 있을 때다. 어두움과 혼란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아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두움에서 빛이 뻗어 나오는 것을 볼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에 소망을 갖기를 바란다. 혼돈과 공허함,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 아름다움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신 후에 보기에 좋다(טוֹב) 하셨고, 히브리어 토브(טוֹב)는 ‘좋다”는 뜻 외에 ‘선하다’ 또는 ‘아름답다’로 동일하게 해석될 수 있다. 다행히도 이 감춰진 아름다움은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모습과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 절정의 아름다움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다. 이는 흠이 없는 단 한 명을 찾아 멘토를 삼으려 평생을 노력하고, 완벽한 지도자로 세우려 온 인생을 다 바치는 사람들이 발견해야 하는, 단 하나의 완전한 사람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또한 죄로 오염된 피와 제물은 아무런 힘도 효력도 없다.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받은 쓰라린 상처와 아픔으로 밤을 맞을 때면, 찬송가를 펴서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주의 보혈에 내 모든 것을 걸고 찬양해 보라. 인간으로 태어나서 완전하게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과 그의 희생의 피에 의지해 나의 짐과 죄를 풀어 놓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절대적인 경지의 이름다움이 무엇인지 결단코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을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으로’ 믿고 그를 따르며 살기로 결심했다면, 세상의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쫓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없게 된다. 그가 보여주시고 드러내신 삶의 방식이 아름답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에 그저 수긍하고 안심하고 행복하게 따라갈 뿐이다. 그렇게 혼돈과 어두움 속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삶의 추한 것을 제거해 나가고, 추한 사람을 피함으로써 그 아름다움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볼 줄 알며 깨어지고 부서진 삶과 마음들 속에 그 조각난 파편들을 모아 다시 새롭게 빚어지고 창조되도록 돕고 중보하며 기다린다.

실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식’의 흔적을 더듬어 가며 드러내는 삶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모든 어두운 상황 속에서 ‘경외’라는 마음을 품고 집중해서 계시된 빛에 반응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 안에 선하고 아름다운 빛이 절대 머물지 못할 것이라는 악몽과 마주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놀라운 소식이 내 삶의 전체를 에워싸고 점령하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은 마치 이사야의 노래처럼,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위로와 소망의 탄성이 흘러나온다. 내 주님과 걷는 이 길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Soli Deo Gloria!

by 서나영, TGC

 

02.08.2025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