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은 신화인가?

고고학적 및 역사적 증거로 나타난 생생한 역사 속의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언급된, 전 세계인이 아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거기에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역사적 신뢰성에 대한 일반적인 회의론까지, 출애굽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결과 출애굽 사건은 다양한 시기에 걸쳐서 발생한 여러 번의 역사적 사건 중 일부를 모아서 하나로 편집한 이야기, 즉 신화 내지 전설로 여겨진다. 출애굽의 역사성에 반대하는 흔한 주장 중 하나는 그 사건에 대한 증거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및 역사적 증거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에 대한 성경의 설명이 믿을 수 있음을 가리킨다.

이집트 내 히브리인

 

이 중대한 이야기의 첫 번째 구성 요소는 히브리인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집트로 이주하여 거주했다는 주장이다. 넓은 의미에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가나안에서 온 셈족이 이집트로 이주하여 북동부 나일 삼각주 지역(고센)에 정착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는 특정 형태의 도자기, 매장 관습, 도구 및 무기, 비문, 역사 기록, 레반트 양 품종, 벽화, 심지어 수입된 신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게다가 출애굽 이전 이집트에 히브리인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다. 기원전 17세기경 테베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파피루스 브루클린 35.1446에 담긴 이집트의 가정 노예 목록에는 요셉처럼 새로운 이집트 이름을 부여받은 30명 이상의 셈족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창 41:45). 히브리인과 관련된 다른 이름들, 예를 들어서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된 스카라브(scarabs, 풍뎅이 모양의 일종의 부적) 속 야곱-엘(야쿠브)이라는 이름과 데이르 엘-바리 지역에서 찾은 깨진 도기 조각 속 아마도 예세(유샤이)라는 이름은 출애굽 이전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집트에서는 또한 셈족이나 아시아인에 대한 광범위한 노예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아모세 1세와 18왕조의 건국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그 무렵은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이 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한 바로 그때였다(출 1:8-14; 5:4-19). 이 노예화 과정에는 진흙벽돌 생산, 건설 프로젝트, 그리고 농업이 포함되었다. 히브리인 노예 제도에 대한 기록은 18왕조 초기에 진흙벽돌로 지어진 대규모 저장 시설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라메세스(텔 엘-다바)와 피톰(텔 레타베) 지역 발굴을 통해서 발견되었다. 또한 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강둑에 지어진 이집트 왕궁과도 일치한다(1:11; 2:5-10; 행 7:20-22).

 

출애굽과 바로의 날짜

 

하지만 출애굽의 역사성을 확인하려면 탈출 시점을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는 명백한 단서와 미묘한 단서,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열왕기에는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 첫 해인 기원전 967년경이 출애굽 이후 48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왕상 6:1). 이는 사울이 등장하기 약 50년 전인 기원전 1100년경,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이미 300년이 지났다는 입다의 주장과 일치한다(삿 11:26). 또한 출애굽에서 성전 건축까지 19세대가 지났음을 알 수 있는데, 각 세대를 평균 25년으로 잡으면 약 475년이 된다(대상 6:33-37).

또한, 고대 근동의 여러 사원에 헌납된 비문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맥락에서 태양년을 세었다는 정보를 확인한다. 따라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질적인 시간표를 기록하고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고, 우리는 성전 건설 시점부터 거슬러 올라가 합리적으로 출애굽 시점을 대략 기원전 1446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제 탈출 기록을 뒷받침하는 외부 증거를 특정 시간대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점에 해당하는 이집트 역사를 보면, 아멘호텝 2세가 막 파라오가 되었다. 그의 전임자 투트모세 3세는 40년 이상 통치했다(출 2:23; 4:19; 7:7; 행 7:30 참조). 이는 출애굽 이야기에 맞는 다른 사건들과 함께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역사적인 탈출이 일어났음을 나타낸다.

고대 이집트 문서, 비문, 고고학적 발견물 역시 파라오의 첫째 아들의 의문의 죽음, 군대의 쇠퇴, 나일 삼각주에 있는 왕궁 포기, 하트셉수트의 몰락 시도, 그리고 가나안으로의 노예 습격을 암시한다.[5] 게다가 기원전 3세기에 이집트의 사제이자 역사가인 마네토는 아멘호텝(아메노피스)을 히브리인 탈출 당시의 파라오로 지명했다. 더욱이 “이푸웨르의 훈계”라는 흥미로운 이집트 시는 출애굽 당시 재앙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출애굽과의 이 모든 연관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이집트 밖에 있던 이스라엘인에 대한 추가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처음에는 유목민으로, 그다음에는 가나안의 정복자이자 정착민으로 말이다.

 

히브리인의 방랑과 가나안 출현

 

일시성과 취약한 문명으로 인해서 고대 역사 속 유목민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발굴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멘호테프 3세의 솔레브 사원에서 “야훼의 유목민”을 언급한 두 개의 이집트 비문은 기원전 1400년경,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사이에 방랑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문은 이집트인들이 신의 개인 이름(여호와)과 이스라엘 사람들, 즉 고대에 여호와를 경배한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출애굽 후 약 40년이라는 시기,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에 있었던 이들의 위치, 그리고 유목민으로서의 그들의 지위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난 후 방랑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출 5:1; 민 14:14).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 나타나 많은 도시를 정복하고 그 지역에 정착했다. 가나안 정복의 역사성과 날짜와 관련된 증거는 파라오와 여러 가나안 왕들이 교환한 서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아마르나(Amarna) 편지라고 불리는 설형 문자판은 전쟁을 벌이고 무력과 교활함으로 도시를 점령하는 외부인 집단인 하비루(Habiru)를 언급한다.

또한 이스라엘 정복과 관련된 파괴의 고고학적 증거로는 여리고성을 포함해서 여호수아서 이야기에 언급된 주요 도시들과 관련한 대규모 화재 파괴, 무너진 성벽, 약탈 없음, 그리고 기원전 1400년경의 오랜 방치 등이 언급되고 있다. 그 후로 많은 지역에서 나오는 정착 증거는 독특한 건축, 도자기, 식단 및 종교적 전통을 가진 새로운 집단이 가나안에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13세기 후반의 메르넵타 석비는 이 사람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데, 파라오에 의해서 언급된 가나안 유일한 집단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과 더불어서 다양한 많은 발견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에 대한 성경적 서술의 역사적 신뢰성을 뒷받침한다. 이제 우리는 더 큰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살아있는 말씀을 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다.

by Titus Kennedy, TGC

 

12.1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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