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생명의 달, 4월이다. 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수많은 꽃들이 자태를 뽐낸다. 철따라 대자연의 변화와 아름다움은 신비롭다. 하지만 인간사회는 왜 이렇게도 투쟁적이며 평화가 없을까? 동물사회처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대결, 미안마의 지진, LA와 한국의 산불로 많은 이들이 죽고 재산적 피해를 입었다. 도처에서 배회하는 난민들과 홈리스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이들 외에 사회와 가정에서까지 버림당한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문명발달과 함께 빈부귀천 없이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사회가 안타까울 뿐이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누가 저들을 주의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가? 교회이다. 이제 기독교 교회들이 게토(Ghetto)적 담장을 헐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삶과 사역의 모델이신 주님은 결코 안온한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상에서 살 소망이 없는 자들을 향해 찾아다니셨다.
1. 구제의 당위성
구제(Giving, 救濟)의 사전적 정의는 “불행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다. 왜 교회가 구제 사역을 힘써야 하는가? 구제는 신, 구약에서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신 15:10-11). 가난한 형제를 향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악한 눈으로 대하거나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구제하지 말며 궁핍한 자를 향해 손을 펴라(신15:7-11).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 2:15-17). 구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히13:16)이다. 무엇보다 우리 주님은 가는 곳마다 배고픈 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등 긍휼사역을 펼치셨다 (마 4:23).” 따라서 교회는 구제할 의무가 있고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부끄러움 없이 구제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제는 단순히 여유 있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적선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구제가 단순한 인간의 선행이라면, 기독교의 구제는 사회경제학적 복지 보다 훨씬 뒤떨어진 개념일 것이다. 성경적 구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구체적인 물질과 치료의 행위로 실현되는 영적 사건이다.
2. 구제의 모범적인 사례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1서3:17,18). 자선(慈善) 냄비는 구세군 사관 조지프 맥피(Joseph McFee)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시 빈민들과 갑작스런 재난으로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천여 명의 사람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했었다. 그는 오클랜드 부두로 나아가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을 다리를 놓아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렇게 써 붙였다. "이 국솥을 끊게 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불우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웃을 돕기 위해 고민하며 기도하던 한 사관의 마음이 오늘날 전 세계 100여 개국으로 확장되었다. 구제의 손길은 매년 성탄이 가까워지면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타고 우리 사회 깊숙이 파고든다.
마라톤 경주에서 낙오자가 있듯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는 도저히 홀로 설 수 없는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이 많다.
교회는 게토적 담을 헐고 세상으로 나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3. 유대인의 구제 원칙
히브리어로 구제를 가리켜 쩨다카(צדקה)라 한다. 이 단어의 본뜻은 “의로움, 공의”라고 할 수 있다. 원뜻만 가지고 말하면 구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구제라는 용어로 사용하게 된 것은 유대인의 전통에 기인한다. 그들에게서 구제란 공의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의무라고 믿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남을 돕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 그들은 철저히 모으고 절약하며 가치 있는 곳에 통 크게 봉헌한다. 그들은 상대방을 도울 때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무척이나 배려한다. 1) 가장 높은 구제의 단계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어 사업을 일으키게 하거나 동업 또는 직업을 구해 주어 구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경우이다. 2) 돕는 자나 도움을 받는 자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구제를 받는 사람은 누가 자기를 돕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받을 일이 없다. 3) 돕는 자는 누구를 도우는지 알지만 도움을 받는 자는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4) 도움을 받는 자는 자기를 돕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누구를 도우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5)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으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연결되는 경우이다. 6) 어려운 사람의 요청을 받고 직접 돕는 단계다. 7) 자기가 도울 수 있는 양보다 적은 양을 돕되 기쁜 마음으로 돕는 경우이다. 8) 가장 낮은 단계로서 무뚝뚝한 태도로 돕는 경우이다.
4. 구제대상과 방법
구제는 대체로 기본적인 생활과 관련되어 있다. 즉, 빵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재정 능력이 안 되어 학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일을 할 수 없으며 도저히 홀로 자립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생활 능력이 없는 고아나 과부, 소년 소녀 가장들이다. 다만 예외가 있다. 신체적으로 건강하여 얼마든지 일할 수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나태한 자들은 구제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도움을 주면 오히려 자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목적이 좋으면 그 방법도 좋아야 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구제에 대하여 은밀하게 실행하라고 명하셨다. 그 이유인즉 구제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구제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외식이다"(마6:2). 순수성이 사라진 구제는 거지에게 주는 적선과 다를 바 없다. 나아가 성경의 원리대로 구제를 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11:25).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6:3). 그러므로 교회는 값싼 구제로 매스컴에 자신이나 단체의 이름을 들어내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와 배치되며 도움을 받는 이에게 부끄럼과 부담을 주게 된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랑의 표현이다. 구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곳에는 어떠한 조건도 들어가 있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맺음 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선행의 대표적인 것이 긍휼 사역이다.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선교와 구제를 멈춰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교회를 교회 되게 한다. 우리는 구제가 비단 절기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습관화되어야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우리 사람은 누구나 구제할 것은 없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다”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는 개인이나 단체, 교회는 비록 적은 양일지라도 뭔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1 보화라 할지라도 더 필요한 자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기 때문이다. 긍휼 사역에는 중요한 원리 하나가 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도 줄 수는 있으나 주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구제는 선교의 연장선에 있다. 여호와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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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