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행적을 돌아보는 고난 주간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2024년 고난주간이 다가오고 있다. 금년은 3/24-30일까지이다. 고난 주간은 사순절 끝자락에 있다. 사실 우리 기독교는 이슬람에 비해 너무 자유롭다. 좋은 신앙이란 육신의 소욕을 절제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다. 우리 개신교는 말씀 중심을 강조하다 보니 예식과 절기에 대한 의식이 희박하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고난 주간만큼은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기독교의 핵심 사건들과 사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없는 자에게는 부활도 없다. 어떻게 하면 이 시기를 좀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그것은 날자 별로 예수님의 행적을 따라 말씀 가운데 주어지는 메시지를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 첫째 날: 종려주일(Palm Sunday)은 개선의 날이다 (마21:1-11, 막11:1-11, 눅19:28-38, 요12:12-15).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 때에 군중들은 승리와 영광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나왔다. 그리고 목청껏 “호산나”(지금 구원하소서)라고 외쳐댔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너진 다윗왕조를 일으킬 정치적 메시아로 오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외세의 압제 가운데 신음하고 있던 그들에게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패권적 왕이 아니라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시킬 구세주로서 오신 것이다.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이를 잘 암시하고 있다. 구약이 평강의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그렇게 언급했건만 영안을 뜨지 못한 사람들은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다(요1:9-11).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 둘째 날: 월요일은 청결의 날이다 (마21:12-19, 막11:12-19, 눅19:45-48).  예수님은 이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다. 이어서 주님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타락시킨 매매 자들에게 거룩한 분노를 발하시며 그들을 몰아내고 물건들을 뒤엎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 곳이 강도의 굴혈처럼 보였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며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만나 주시는 장소였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성전을 예표한다. 건물 중심에서 사람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즉, 예수님이 성전이고 그 영이 거하는 곳이 다 성전이다 (고전 6:19). 그러므로 우리도 내주하신 성령이 탄식하지 않도록 늘 참회하며 정결하게 유지해야 한다.

#. 셋째 날: 화요일은 변론의 날이다 (마21:23-24:14, 막11:20-13:37, 눅20:1-21:38, 요12:20-50).  예수님께서 이 날 가장 여러 가르침을 주셨다.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으셨고 답을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라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인해 눈물 흘리셨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있을진저” 라고 말씀하시면서 외식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 후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제자들에게 종말설교를 하였다. 예수님은 종말에 대한 일곱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마24:32-25:46). 내용인즉; 무화과나무의 비유, 인자의 임함이 노아 때와 같다는 비유, 데려감을 당하는 것과 버려둠을 당할 것의 비유,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비유 등이다. 성경은 무화과나무 가지가 연하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이 온줄 알 듯이 종말적 징조를 많이 언급했다. 우리는 주님 재림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있는가?

#.넷째 날: 수요일은 예비의 날이다 (막14:1-11). 예수님은 이날 별다른 활동 없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시며 닥쳐올 고난을 대비하고 계셨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루살렘에서 가룟 유다까지 끌어들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날 한 여인이  가장 귀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 깨뜨려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한 데나리온은 성인 하루 품삯에 해당됨으로 그 값은 약 3,000만원 정도의 비싼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가 어리 섞은 짓을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칭찬했다.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행을 이미 알고 장례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 옥합을 깨뜨려 본적이  있는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경험이 없는 자는 부활도 없다.

주께로부터 은혜 입은 자라면 고난주간을 건너뛰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심령을 비우고 그리스도로 채운다면 생명의 싹이 날 것이다.

 

#. 다섯째 날: 목요일은 고별의 날이다 (마26:17-26:46, 막14:12-42, 눅22:7-46, 요13:1-17:26).

무교절 첫날 곧 유월절 양을 잡는 기념일인 이날 저녁,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내 한 집의 큰 다락방에서 유월절 기념 만찬을 가졌다. 주님은 자기를 팔 가룟 유다까지도 제하지 않고 떡과 잔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멋모르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툴 때, 예수님은 일어나 그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이후 예수께서 기도의 습관을 따라 감람산이라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던지 땀이 땅에 떨어져 피 방울 같이 되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고별예식을 한 후 처연(凄然)하게 엎드리신 주님의 모습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는가?

#. 여섯째 날: 금요일은 죽음의 날이다 (마26:47-27:61, 막14:43-15:47, 눅22:47-23:56, 요18:1-19:42). 예수님은 이날 새벽 한 시경에  가룟 유다가 앞잡이로 끌고 온 군대와 성전관리, 제사장의 하속들에게 체포되었다. 주님은 대제사장의 집에서 동이 틀 때까지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서 종교재판을 받으셨다.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 받은 예수님은 총독 빌라도의 관저로 끌려가셨다. 빌라도는 유대 종교지도자와 무리의 압박에 못 이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 프레토리움 뜰 안에서 로마병사들은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씌우며 침을 뱉었다. 이어서 성 밖 골고다의 형장까지 매질하며 갔다. 오전 9시경,언덕에 십자가 형틀이 세워지고 예수님은 손과 발에 못 박힌 채로 사막의 땡볕 아래 6시간 매달려 계셨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 주님은 오후 3시에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신 뒤 운명하셨다. 이에 지진이 일어나고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이 역사적 광경이 상상이 되는가?  진정 크리스천이라면 한 끼라도 금식하며 주님의 아픔을 체휼(體恤)함이 마땅한 자세가 아닐까? 

#. 일곱째 날: 토요일은 침묵의 날이다 (마27:62-66). 이 날은 예수님의 행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무덤에 묻혀 계셨기 때문이다. 굳이 추측해보자면 두려움, 슬픔, 고통, 절망 등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날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까? 가능한 분주한 삶의 자리를 피해 한적한 곳에서 묵언수행(默言修行)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특히 십자가상의 7언을 묵상하며 예수님과 영적 교제를 갖는다면 쉼과 위로의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비록 주님은 떠났어도 그 분이 남기고 간 말씀은 우리 폐부(肺腑)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33:34).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27:46).  5. 내가 목마르다(요19:28). 6. 다 이루었다(요19:30). 7.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맺음 말

올 해도 뜻 깊은 고난주간이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때를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한 주간을 평소 일상처럼 보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덧입을 수 없다. 뭔가 비상한 조치가 필요하다. 지나친 오락이나 잔치 등과 같이 우리 자신을 유쾌하게 하는 일은 금해야 한다. 특히 인터넷, 핸드폰, TV 등을 통해 들어오는 수평문화와 세상 소식들을 가능한 절제하는 것이 좋다. 더러운 오물이 담긴 그릇에 생명수를 담을 수 없지 않는가? 대신 하나님 앞에 (Coram Deo) 단독자로 서서 자아를 성찰하면 우리 영혼에 켜켜이 쌓인 적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된 회개로 심령을 비우고 그 자리에 대속제물 되신 예수님으로 채운다면 은혜의 단비가 한량없이 내리지 않을까 보냐? 이 생명의 계절에 !

Jrsong007@hanmail.net

03.2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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