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녹스는 게 두렵지, 닳아 없어지는 건 두렵지 않다.” 한국교회의 산 증인이자 ‘영원한 현역’이란 별명을 가진 방지일 목사를 생각해본다. 그는 2014년 10월 10일 소천 하셨다. 향년 103세였다. 고인은 당시 10월 14일 한국교회100주년 기념관에서 유가족과 교계를 대표하는 여러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기독교회장”으로 천국환송 예배가 드려졌다. 그는 1911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고 방효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선천의 신성 중학교와 평양 숭실대에서 공부한 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재학 당시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지이자 길선주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던 장대현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사역을 했다. 1937년 신학교 졸업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중국에 선교사로 보냄을 받았다. 방 선교사는 중국 산둥성에서 1957년 추방되기까지 21년간 선교를 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서울 영등포 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1979년 원로목사에 추대됐다. 1972년 예장통합 총회장, 1976년 기독공보 사장, 대한 성서공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하신 고인은 손양원, 한경직, 박윤선 목사와 함께 한국 기독교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오늘날 영적 지도자에 대한 권위와 신뢰가 땅에 떨어진 지금 우리는 한국교회의 고결한 발자취를 남기고 간 고 방지일 선교사의 인격과 삶과 사역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 제1기 선교사로서 삶과 사역(1938-1957)
방선교사는 1937년 예장 총회의 가결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미 부친 되신 방효원 목사가 1916년 선교사로 중국 산둥성에 파송을 받아 선교활동 중이기에 이를 잘 돕기 위해서였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다. 일본은 그들이 운영하는 어용단체인 대동아 선교회에 가입할 것을 권했으나 거절하고 순수 복음 활동에 전념하셨다. 그는 당시 다섯 번의 정변으로 인해 숱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는 자기 생명 유지도 쉽지 않은 환경에서 중국인 뿐만 아니라 한인교포 난민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돌보았다.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자 본국 총회에서도 철수 지시를 내렸다. 미국영사관에서도 마지막 철수하는 배에 탑승할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그러나 방 선교사는 거절했다. 그는 서양선교사들이 추방된 어려운 공산당 치하에서도 홀로 남아 중국인 신자들의 신앙을 돌보며 어려움을 함께 하였다. 결국 1957년 중국 당국은 그를 북한으로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 때 서방 언론에 그가 중국에 남은 마지막 기독교 선교사라고 알려져 한국으로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2. 제2기 목회자로서 삶과 사역(1958-1979)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철수 한 방선교사는 제 2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서울 영등포 교회를 담임하며 한국교회 안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었다. 방목사의 목회 핵심은 사회봉사나 각종 프로그램에 치우친 행사 보다는 기도와 말씀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담백한 목회 그 자체였다. 그는 말씀이 소외되고 감성에 치우치는 부흥을 경계했다. 진정한 부흥은 오직 말씀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죄를 찾는 현미경이라고 하셨다. 열심히 하나님과 대화하다 보면 현미경의 렌즈가 맑아지면서 평소엔 보이지 않던 작은 죄도 찾아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목회는 어떤 기술 보다는 욥이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고 그들의 “명 수대로” 번제를 드린 것처럼 교인들의 명수대로 하나하나 제단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한 영혼을 소홀히 한 체 오로지 양적 성장을 앞세우는 오늘 다수의 교회에 대한 따끔한 충고이다. 더욱이 주변의 작은 교회를 배려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대형교회를 질타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 제3기 지도자로서 삶과 사역(1980-2014)
방목사는 1979년 은퇴한 뒤부터 1년 가운데 절반 정도는 국내·외 집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설교 요청이 들어오면 노구를 이끌고 부르는 곳 어디든 말씀을 전하러 가셨다. 방목사는 한국교회가 하나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안타까움이 많으셨다. “예수님은 교단 만들려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만들러 오신 교주가 아니다. 죽으러 오셨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1937년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만 해도 한국 장로교는 하나였다. 1959년 당시 예장이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될 때 우체국에서 사방으로 전화해 말리며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나아가 “믿음이란 투항인데, 아직도 우리는 내 주관과 경험으로 무장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보혜사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무장을 완전히 해제할 때 비로소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주의 일에 나를 개입시키지 말고 제거할 것을 요구하셨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가 아니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가?” 말이 들릴 정도로 교회 안에 경쟁과 반목과 분열이 치열한 이 때에 우리 교회는 방 목사의 외침을 경히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방지일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예배당은 교실이 아니다.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강연장도 아니고 재미있게 듣자는 역사 이야기장도 아니다. 개신교의 본령은 사회공헌이나 복지 사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데 온 힘을 쏟으라는 것이다. 구원 역사에 내 몫은 없다. 내가 할 일은 그 지배에 순종하는 것이다. 내 몫을 끼울 때 하나님의 성역이 오손될 뿐이다.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한다면 그것은 내 직업이요, 영업이요, 사업이다. 그저 골방에 들어가 주시는 말씀을 받고 전달하는 것이요 메시지는 “오직 성령으로” 이것뿐이다.
그는 공산치하에서 선교사로서 마지막까지 양떼를 지켰다.
그는 목사로서 술수보다 말씀과 기도로 건강한 목회를 했다.
그는 원로로서 하나님의 킹덤을 바라보며 연합적으로 사역했다.
5. 방선교사에 대한 후대의 시각
방목사는 2013년 국가 조찬 기도회를 인도하셨다. 그 때 박 대통령께서 방 목사님께 의자에 앉아 설교하시기를 권했으나 그는 끝까지 서서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는 이토록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올곧은 신앙인이었다. 그는 중국이 공산화되며 모든 선교사들이 철수함에도 홀로 남아 중국의 영혼들을 살폈던 참 목자이셨다. 방목사는 교회 부흥을 위해 특별한 술수나 이벤트보다 말씀과 기도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목회자였다. 그는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태에 나의 킹덤보다 하나님의 킹덤을 의식하며 교회 일치를 바라는 지도자였다. 그는 거실 액자에 “격산덕해(格山德海): 인격을 산같이, 덕을 바다같이 쌓으라"는 의미처럼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탐욕에 물들지 않고 청빈과 내려놓음의 자세로 후배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되셨다.
맺는 말
방지일 선교사는 “닳아서 죽을지언정 녹이 나서 죽지 않겠다.”라는 좌우명처럼 천수(天壽)를 다하시기까지 주님을 위해 일하다 가셨다. 어떻게 100세가 넘었음에도 기력이 정정하며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사역을 할 수 있었을까? 방선교사가 함께 하고 있으면 굳이 말씀을 하시지 않아도 그 자체가 메시지였다. 방 선교사는 확실히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보내주신 위대한 목자요, 선각자였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를 못 잊어하는 것은 어떠한 업적보다 그의 고고한 인격과 청빈한 삶 그리고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아직도 그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때리는 것 같다. 이런 분이 우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선교사였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후대를 책임져야 할 우리들은 이 시대의 영적 사표인 방선교사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이다.
Jrsong007@hanmail.net
12.0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