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중동의 화약고가 다시 폭발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حماس, Hamas)가 지난 7일(현지시간) 새벽 이스라엘을 7,000여발의 로켓으로 기습 공격했다. 이번 사태는 이스라엘 판 9·11 테러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파장을 낳고 있다.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은 “전쟁”을 선포하면서, 10일 현재 나흘째 보복공습을 하고 있으며 지상군 투입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지난 1973년 시리아와 이집트의 이스라엘 침공 이후 50년 만에, 5차 중동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기약 없이 이어지는 와중에 터진 또 다른 화약고는 세계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러다가 제 3차 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 비극이 더 커지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좋든 싫든 인류는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이다. 몸에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온 신경이 그 쪽으로 쏠리듯 지구촌의 한 전쟁은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1.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의 신음소리
아비규환이란 그 끔찍함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지금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인 하마스의 통치지역인 가자지구에는 양 세력의 충돌로 무고한 백성들이 살상을 당하며 극도의 공포 가운데 있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양측에서 1,600명 이상이 숨지고 6,000명 이상이 다쳤다. 약 100여명 이상의 이스라엘인이 하마스 대원들에게 인질로 잡혀가 있다. 저들은 어떤 상태에 있을까? 가히 상상이 안 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참상도 마찬가지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전쟁이 시작된 지 18개월째인 현재 러시아군에서 사망자는 12만 명, 부상자는 17만∼18만 명으로 집계됐고 우크라이나 군에서는 사망자 7만 명, 부상자 10만∼12만 명이 추정된다고 했다. 두 국가의 사상자를 합치면 러시아 측에서 30만 명, 우크라이나 측에서 20만 명, 도합 50만 명이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이미 죽은 사람은 아무 소리가 없다. 하지만, 아들딸을 잃은 가족의 탄식소리, 팔과 다리를 잃고 고통 속에 있는 부상자들의 외마디 소리, 포로로 잡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의 신음소리, 칠흑같이 어두운 밤 참호 속에서 새우 잠자는 군인들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분노, 눈물, 절망, 슬픔, 두려움의 절규가 하늘에 상달되고 있을까?
2. 인간 폭력의 기원
무리 생활을 하는 영장류(靈長類)는 일반 포유류보다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이 두 배 정도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문명화 이후 살상률이 10~20배나 급증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동물들은 근본적으로 먹이와 성(性)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이는 개체 간의 이익과 욕망의 싸움이다. 반면 인간끼리의 대결은 폭력 자체, 즉 상대방을 말살하고 멸절시키는 것을 목표로 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소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떻게 동물보다 못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이러니하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렇듯 인간은 개인이든 종족이든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며 탐욕이 있다. 욕심이 장성하여 집단 이기주의화 하게 되면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으로 비화되기 일쑤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가 내리막길을 달리듯 멈추기 어렵다. 그 후과는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상이 도래한다. 특히 현대전은 고도로 발달된 살상 무기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들이 죽거나 다치고 생태환경은 쑥대밭으로 변한다. 놀라운 사실은 인류가 이러한 결과를 알면서도 전쟁을 지속해왔다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Will Durant)는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햇수는 고작 29년”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판을 칠 세상에서는 과연 어떤 전쟁이 도래할 것인가?
3. 전쟁에 대한 3가지 견해
전쟁과 관련해서 기독교에는 3가지 견해가 있다. 평화론(平和論, Pacifism Theory), 성전론(聖戰論, Holy War Theory)), 정당론(正當論, Just War Theory)이다. 평화론(平和論)은 전쟁과 폭력을 무조건 반대한다. 무저항 비폭력 혹은 반전을 주장한다. 이유인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전쟁은 제6계명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은 완악한 원수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희생을 통하여 끝까지 평화를 추구하셨다. 그 의미는 평화가 최고의 가치라는 것이다. 성전론(聖戰論)은 상대방이 선제공격(先制攻擊)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떤 대의(大義), 즉 큰 목적을 갖고 있는 전쟁은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전이란 전쟁을 신성화하는 것이다. 11세기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이다. 악이 지배하는 곳을 방치하는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되기에 선을 위해서는 무력행사도 합당하게 여긴다는 이론이다. 정당론(正當論)은 가급적 전쟁은 안 하는 것이 좋지만 어떤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사악한 목적으로 침공했을 때 당하고만 있어야만 하는가? 이때는 영토, 국민,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마땅히 방어권을 수행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인간끼리의 살상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인간의 탐욕이 장성하여 집단 이기주의화로 뭉치면 전쟁으로 비화된다.
교회는 개인 영혼구원뿐만 아니라 사회구원에도 책임 역할을 해야 한다.
4. 어거스틴의 전쟁규약(The Code of War)
이상적으로는 평화주의(Pacifism Theory)가 최고다. 그런데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죄 성을 생각한다면 과연 평화로운 사회가 구현될 수 있는가? 성전론(Just War Theory)은 인간의 뜻을 신의 뜻으로 동일시할 위험이 있다. 자기는 의롭고 상대는 악하다고 여겨 ISIS처럼 극단적인 악행을 하게 된다. 십자군운동이나 이슬람의 지하드 등 성전론은 공통적으로 그들의 신(神)을 오해해 왔다. 기독교회는 역사적으로 ‘정당전쟁론’(正當戰爭論, Just war theory)을 지지해 왔다. 비록 살인을 하면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 평화주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악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부득불 의로운 전쟁(just-war)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어거스틴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는 다음 몇 가지 조건( The Code of War)아래 전쟁을 허용했다. “*전쟁은 정당한 목적, 즉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전쟁의 태도와 행위, 즉 폭력이나 약탈, 대학살이 배제되어야 한다. *전쟁은 합법적 권위 아래 수행되어야 한다. *수도승과 성직자는 절대로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정당한 전쟁이 되기 위해선 그것이 최후수단이어야 한다. *비무장 민간인을 보호하는 분별성이 있어야 한다. 전쟁의 이득이 발생할 수 있는 손해보다 커야한다는 비례성을 지녀야만 한다.”
5. 교회의 3중직 역할
우리 교회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해 그들이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도록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마 6:10)가 미칠 수 있도록 사회 구원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빛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가 미치는 곳에서는 결코 다툼이나 전쟁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첫째 선지자적 역할이 필요하다. 전쟁이 터진 후에는 이미 늦다. 미리 예견하고 긴장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정하며 피차간에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 둘째는 왕적 역할이다. 이는 현재형이며 다스림을 의미한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일어난 곳에 교회가 방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포화와 살상이 멈추도록 온갖 노력을 다 해야 한다. 셋째 제사장적 역할이다. 전쟁이 끝난 곳에는 탄식과 울분과 아픔이 하늘을 찌른다. 이곳에 인간의 말과 도움으로는 저들의 상처를 싸맬 수 없다. 누가 양심이 마비된 침략자들을 회개케 할 수 있는가? 누가 한 맺힌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겠는가? 교회가 십자가의 능력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
맺음 말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20세기가 이데올로기(Ideology)로 말미암는 전쟁이었다면, 21세기는 문명 간 종교 간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일찍이 한스 큉(Hans Küng)은 각 종교가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며 포교나 선교에 힘쓰면서도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종교간의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주장은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촌의 안녕을 위해 전쟁을 막아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평화는 “히브리어: 샬롬, 아랍어: 살람, 헬라어: 에이레네, 라틴어: 팍스, 중국어: 핑안”이다.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를 가리키는 적극적 개념이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되 비록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하늘의 평화가 이 땅에 구현되도록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선교의 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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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