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모름지기 선교사는 파송 받은 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로 임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서는 새 생명을 낳기 어려운 이치 아닌가? 선교사가 현지 사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가능한 본토 친척 아비 집과의 연(緣)을 최소화해야 한다. 선교사가 강과 바다를 건너 타 문화권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국(母國)문화에 젖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릴 때 사역은 겉돌기 쉽다. 18세기 중엽,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문명의 미발달로 인하여 선교사들이 어쩔 수 없이 선교지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지구촌이 일일생활권으로 들어왔다. 이는 선교적 측면에서 순기능과 역기능을 낳고 있다. 지금 선교사들이 현지인과 그 나라 사역을 위해 올인(All In)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거룩한 지상 과업은 적당히 시늉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처럼 미션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뭔가 결과를 낼 수 있다.
1. 강과 바다를 건넜던 믿음의 영웅들
아브람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북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고대 중동문명의 중심지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람더러 그 땅을 떠나라고 하신 이유는 그와 자손들을 우상 문화(수 24:2-3)에 물들지 않게 함이요 나아가 가나안 땅에 제사장 나라를 세우며, 때가 차면 그 혈통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사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아브람은 75세에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강을 건넜다. 모세는 200만명 이상의 유대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넜다. 홍해는 애굽에서 430년간의 노예생활과 인간중심의 문화를 청산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여호수아는 선임자 모세의 바통을 이어 그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입했다. 요단강은 광야 40년의 방황과 연단을 마치고 장차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豫表)하는 종말론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땅끝 선교를 위해 지중해를 건넜다. 그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혈통적, 문화적, 종교적, 유대의 옷을 벗고 복음의 사도로서 목숨까지 걸었었다. 이상에서 보듯 강과 바다를 건넌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명 완수를 위해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히 12:1) 온전히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2. 대양(大洋)을 건넜던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Hudson J. Taylor, 載德生)는 근대선교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 그는 중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요,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창시자였다. 테일러는 17세에 회심한 후 21세가 되던 때에 중국선교사로서 장도에 올랐다. 그가 탄 배는 “덤프리스”라는 작은 쌍 돛 범선이었다. 그 배는 1853-9-19일 영국의 리버플 항을 떠나 대서양-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거쳐-인도양-태평양을 항해한 후 1954-3-1일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정확히 5달12일만 이었다. 그는 중국인들이 복음에 대한 메시지보다 자신의 복장과 태도에 더 호기심이 있는 것을 보고 달라지기로 결단했다. 그는 변발(辮髮)을 하고 중국옷을 입으며 모든 생활을 저들과 동일하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54년이 지날 즈음 중국에는 18,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중국내지 선교회에는 825명의 선교사들이 일하게 되었다. 테일러(Taylor)는 중국 땅에 묻어 두었던 아내들과 자녀들의 무덤을 다녀온 지 몇 주 후에 고요히 주님의 품에 안겼다. 1905-6-3일, 그 나이 73살이었다. 그는 어록에 “만일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단 하나도 남김없이 중국을 위해 받칠 것이다.”라고 했다. 테일러는 오늘도 개신교 선교역사에서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이처럼 그가 위대한 족적을 남긴 주된 비결은 무엇인가? 그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중국인을 사랑했으며 그 실천을 위해 몸에 밴 서구문화를 뒤로하고 토착문화를 존중하는 본색화(本色化)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미션이 되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강과 바다를 건너야 한다.
강 건넘이란 사명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상대방을 사랑한 만큼 그 문화도 존중하며 자기희생을 담보한다.
3. 지리, 문화적 강과 시대변화
1760년에서 1820년 사이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가 전까지만 해도 지구촌의 인류는 움직임이 적었다. 약 10,000년 동안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람이 대대로 내려온 부모 형제의 터전에서 태어나 결혼하고 일하며 그 땅에 묻혀야 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선교사도 돛단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가야만 했다. 항선 자체가 고난이며 목숨을 건 행로였다. 선교지에 도착해도 고국의 소식을 듣기 어려웠으며 어쩔 수 없이 현지 문화와 생활방식을 소화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역은커녕 생존 자체도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20세기 이후 시대는 어떠한가? 금세기 100년의 인류 역사는 창조 이래 천년, 만년의 시간보다 더 큰 변화가 있어 왔다. 우리는 돛단배 대신 최첨단 비행기를 타고 24시간 안에 지구촌 어디든 갈 수 있다. 현대인은 컴퓨터, 네비게이션, 스마트 폰으로 무장해 있다. 매일 실시간으로 세계의 동향을 살피며 관계자들과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선교사는 파송을 받았다 해도 현지인을 사랑하며 사역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문명의 이기(利器)를 통하여 온갖 세상 문화가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4. 강과 바다를 건너 사역에 올인하기 위한 방안
“선교는 기도, 선교는 전쟁, 선교는 순교!” 이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서 전 교인을 동원하고 있는 남가주의 은혜한인교회 모토(MOTO)이다. 이 구호는 어찌보면 섬뜩한 면이 없지 않다. 꼭 저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렇다. 사실 미션이 영적전쟁이고 보면 이러한 시도는 당연한 것이 된다. 미션은 그저 설렁설렁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러면 먼지만 일으킬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나가야 하는가? 첫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야 한다(빌 2:7-8). 선교사가 공부 좀 했다고 아니면 가진 것이 있다고 으스대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다. 그런 사역자에게 현지인들이 마음 문을 열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셨다. 선교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섬김의 도를 실천함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둘째는 말씀의 권세가 있어야 한다. 말씀은 그 자체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 4:12). 선교에서 말씀 없이 구제나 사회봉사 등 선행위주로 간다면 영혼들이 어떻게 중생하며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겠는가? 셋째는 일사각오(—死 覺悟)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 사자성어는 주기철 목사님이 1935년 12/17~19일까지 3일간 평양신학교 학생 부흥회에서 설교한 주제이다. 선교의 DNA는 강렬하지않는 한 세상 문화에 함몰되기 마련이다. 선교사가 부모 형제까지 뒤로 하고 산제물 된 자세로 나왔다면 이 정신으로 초지일관(初志一貫)밀고 나가야 한다.
맺음 말
미션이 완수되기 위해서는 사역자가 강과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 의미는 선교 사역에 걸림돌이 되는 무거운 짐이나 죄의 요소를 강물에 버리는 것이다. 나아가 십자가 아래서 죽음과 부활의 능력으로 현지인을 사랑하며 자기희생을 각오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을 위해서는 태생적인 인간 연줄과 자국 문화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모든 의식구조와 삶의 방식을 현지인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선교사가 사역에 집중하기보다 자국인들끼리 어울리며 크고 작은 선교대회에 참석하느라 바쁘다면 그 미션은 보나 마나이다. 이러한 형태는 선교사가 아직 문화적 강과 바다를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한인 선교는 냉철히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말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Jrsong007@hanmail.net
09.30.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