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그 사랑은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이 없는 사랑이란 거짓이다. 사랑이 클수록 희생도 크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신 방법도 처절한 대가를 지불하셨다. 인류의 선교 발자취도 이러한 원리를 따라왔었다. 선교역사에서 이름을 남긴 종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희생정신을 본받아 선교지에서 청춘과 생명을 바쳤다. 따라서 후대를 사는 우리도 앞서간 믿음의 선각자들을 뒤따라가야 한다. COVID-19 이후인 지금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 이론들이 분분하다. 선교전략이나 방법 등을 연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운동경기에서 불문율이 하나 있다. 경기가 잘 안 풀릴 때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의 기본 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해 옥합을 깨뜨리는 일이다. 성령의 역사는 그러할 때 나타나 왔다.
1.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
옥합을 깨뜨린 향유사건은 4복음서가 공히 소개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으며 성도와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함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유월절 엿 세전에 베다니에 오셨고 거기서 잔치가 벌어졌다(요12:1-2). 그때 마리아라 이름하는 여인이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 깨뜨려 그 기름을 주님 머리(마 26:7, 막 14:3)와 발(눅 7:38, 요 12:3)에 부었다. 나드(Nard)란 무엇인가? 아가서 1:12에 “나도 기름”이라고 번역되어있는 “네르드(נֵרד)”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히말라야 산맥에서 자란 발레리 (Valerian)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로서 (참고: 성경의 식물-Nard) 주로 뿌리에서 추출된 향유이다. 나드는 대체로 석회로 만든 옥합이란 예쁜 병에 기화되어 날아가지 못하도록 밀랍으로 봉합되어 있었다. 이는 무역 상품으로서 왕이나 부자 또는 귀족들만 사용할 만큼 귀중했으며 비쌌다. 예수님 공생애 때에는 1데나리온의 값어치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이었으니 지금 시가로 계산하면, 적어도 30,000불 정도 되었을 것이다. 당시 여인들의 경제활동이나 사회적 입지를 감안한다면 나드 한 옥합은 그녀에게서 꿈과 미래, 결혼, 노후까지 대비할 정도로 어쩌면 고이고이 간직한 보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소유물 중 최고의 것을 일순간에 깨뜨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비싼 향유를 낭비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저들을 나무라고 이 여자의 행위를 칭찬했다. 온전한 희생과 헌신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2. 짐 엘리엇 JIM ELLIOT (1927-1956) 선교사
1956년 1월 8일 에콰도르의 쿠라레이 강가, '팜비치(Palm Beach)’라고 부르던 모래톱 위에는 5명의 시신이 창에 찔려 널브러져 있었다. 바로 짐 엘리엇(Jim Elliot)을 비롯하여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 에드 맥컬리(Ed McCully), 피터 플레밍(Peter Flemming), 로저 유더리언(Roger Youderian)라는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몇 달 전부터 접촉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형 비행기를 이용하여 선교방송과 함께 선물꾸러미를 투하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강가에 내려 텐트를 치고 아우카 족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하였다. 이 사건은 닷세째 될 즈음 일어났으며 라이프지와 타임지에 대서특필되었다. 신문논조는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What a unnecessary waste!)”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들이 무엇 때문에 남미까지 가서 제대로 일도 못하고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당시 여론은 무모한 선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짐의 아내 엘리자베스(Elisabeth)는 남편이 순교한 지 2년이 지난 1958년 가을에 목숨을 걸고 어린 딸 밸러리(Valerie)와 함께 아우카 부족을 찾아갔다. 남편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위해서였다. 5년 후 부족을 떠나는 엘리자베스에게 추장이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당신들이 5년 전에 죽였던 그 남자의 아내입니다. 남편이 당신들을 향해 가지고 있던 그 사랑을 당신들에게 전하기 위해 제가 다시 이곳에 왔습니다.” 부인의 말을 들은 아우카 족은 큰 감동을 받고 모두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 중에 짐 엘리엇을 죽인 청년은 나중에 아우카 족의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후에 저들의 추장이었던 사람이 빌리 그래함이 주도하는 한 예배에서 간증을 했다. “우리들은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들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처럼 그분들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초대교회 교부 터툴리안(Tertulian)은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짐 엘리엇이 그 장본인이었다. 그는 19살, 대학 2학년 때에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의 나무토막 같은 인생에 주여! 불을 붙여 주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주께서 소멸시키십시오. 이 몸은 주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이는 희생을 동반한다.
옥합의 의미는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리는 일이다.
교회는 세속의 물결을 차단하고 선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3. 우려되는 기독교 선교의 흐름
지금 세계선교를 향한 크리스천의 열정과 헌신은 어떠한가? 서구교회이든 한국교회이든 급속하게 세속의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다. 첫째, 선교 헌신자이다. 리빙스턴, 허드슨 테일러, 언더우드 등 옛날에는 앞뒤 안 가리고 젊은이들이 20대에 헌신을 했다. 현재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청년들이 있는가? 가뭄에 콩나물 나듯 찾기가 어렵다. 선교 헌신자 대부분은 은퇴 후 사람들이다. 한참 젊을 때는 자기 삶의 자리를 파괴하지 않고 그저 단기선교란 명목으로 선교지를 들락거린다. 둘째, 선교 기도이다. 오늘날 성도들 마음속에 선교를 위해 금식이나 철야하며 눈물로 간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중보기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선교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되기 쉽다. 셋째, 선교 후원이다. 후원금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년 말 예산 편성 시 대외적 지출은 제일 먼저 삭감되기 일쑤다. 그나마 후원마저도 각자의 필요를 채우고 남은 것으로 한다. 넷째, 선교 물자이다. 선교지에 보낸 대부분의 물자는 이미 사용했던 것들이거나 버릴 것들이다. 물론 피선교지에서는 그나마도 감지덕지하다. 고맙기는 하지만 큰 감동은 없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21세기 우리의 선교행태는 세속화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대체로 계산적인 선교, 물량적인 선교, 이기적인 선교, 옥합을 깨뜨리지 않는 선교이다. 이러한 선교패턴은 교회 안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교회가 쇠락해가며 성도들의 얼굴에 기쁨이 없고 가슴이 냉냉한 것은 본질적 사역이 없거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맺음 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말 1:8).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제물은 성물(聖物)이다. 그 제물은 흠(欠)이 없어야 한다. 성경에 온전하지 못한 제물은 열납되지 않는다고 했다. 제물의 조건은 무엇인가? 먼저 제물을 바치는 자가 자원하는 심정으로 하되 흠 없어야 하며 또한 짐승들 중에서 가장 질이 좋은 것이어야 했다. 세계 선교도 일종의 산제사(롬 12:1)된 자세로 해야 한다. 선교적 기도, 헌금, 헌신 등 무엇을 하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본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사람 보기에 모양새는 있겠지만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갈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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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