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2023년 고난주간이 시작되었다. 뜻 깊은 이때에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보기 전에 십자가의 처절한 아픔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NO CROSS, NO CROW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체화(體化)한 대표적인 사람들을 찾는다면 아무래도 옛날에 헌신했던 선교사들일 것이다. 서울 양화진에는 조선에서 선교하다 돌아가신 선교사와 평신도들의 묘가 167기나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묘비가 하나 있다. 루비 켄드릭 (Miss Ruby Rachael Kendrick, 1883~1908)의 것이다. 그녀는 못다 핀 꽃 한 송이처럼 25세의 나이에 병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비록 9개월이라는 짧은 사역 기간이었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선교적 여운은 오늘도 젊은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그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만일 내게 일천 생명이 있다면 그것을 모두 조선에 주겠노라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1. 생애
루비 켄드릭은 1883년 1월28일 미국 텍사스 남 감리교회의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꿈 많은 소녀 시절부터 불신자들에 대한 구령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캔자스 여자성경학교에 진학했다. 1905년 6월에 졸업한 그녀는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선교사 파송 연령제한에 걸리자 교사로 1년, 대학 학부 과정 1년을 수학하면서 해외 선교를 위해 착실히 준비했다. 마침내 그녀는 북 텍사스 엡윗 청년회(North Texas Conference Epworth League)의 후원으로 남 감리회 여자 외국선교부 소속 선교사로서 파송됐다. 그녀는 1907년 8월 29일 미국을 떠나 서울에 도착한 때가 9월이었고, 11월에 황해도 개성에 도착했다. 조선에 온 그녀는 한국말을 배우면서 한영학원에서 교사와 개성 남부 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의 일을 맡았다. 루비 선교사는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았으나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이렇게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사역하던 중 이듬해인 1908년 6월 9일에 급성 맹장염이 걸렸다. 당시 개성에는 서양병원이 없었으므로 서울 제중원으로 급히 옮겼으나 열흘 뒤인 6월 19일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조선에 온지 불과 9개월 만이었다. 젊은 나이에 미처 선교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2. 마지막 편지 일부분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모두들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 같습니다.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 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외국인을 죽이고 기독교를 증오한다는 소문 때문에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 뒤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으로 이제 내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을 만들어 내겠지요. 저는 이곳에서 작은 씨앗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씨앗이 되어 이 땅에 묻히게 되었을 때 아마 하나님의 시간이 되면, 조선 땅에는 많은 꽃들이 피고, 그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바로 이것은 조선을 향하는 저의 열정이 아니라,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선교는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을 요구한다.
루비 캔드릭(Ruby Kendric)은 조선 땅에 자기 뼈를 묻었다.
오늘 선교의 문제는 주님을 위해 죽겠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데 있다.
3. 선교 도전
1908년 엡윗 청년회가 텍사스에서 선교대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서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 한통이 도착했다. 당시에 편지를 일본을 거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선박으로 갔고 다시 미국 내에서는 육로를 통하여 수개월씩 걸려서 전달되었다. 내용인즉, 조선의 기후를 비롯하여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소개하는가 하면 인심이 넉넉한 조선 사람들을 극찬하면서 하루빨리 이들에게 복음이 들어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내용으로 꽉 들어찼다. 그 편지를 읽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이튿날 루비 켄드릭이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가 도착되었다. 편지는 수개월을 걸려서 전해지지만 전보는 즉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겼던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들에게 열 명씩, 스무 명씩 조선선교사로 오라고 일러 주십시오” 이 말이 텍사스 엡윗 청년회 선교대회장에 전달되었다. 그들은 모두 큰 충격에 빠졌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성령께서 역사하사 이 슬픔은 오히려 선교 열정으로 승화되게 했다. 그들 중 20여 명은 루비 친구처럼 자기들도 이방 땅에 가 심장을 묻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4. 평가
루비 캔드릭의 장례예배는 1908년 6월 21일, 주일 아침 8시 30분에 의료 선교사였던 허스트(J.W. Hirst)박사 집에서 드려졌다. 이날 설교는 그녀가 섬겼던 송도 감리교회의 담임목사 왓슨(A. W. Wasson)이 했다. 내용인즉, 루비 켄드릭의 죽음은 모두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손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다. 왓슨의 고백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죽음을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셨다. 그녀의 죽음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고귀한 희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우만 여사는 “수 백 명에게 영감이 되어 온 영혼의 소유자 루비 켄드릭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갔다. 비록 그녀는 죽었지만 오늘날 그녀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호소하고 있다. 그녀의 희생적인 삶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자신들의 생애를 해외선교를 위해 바치고 있다.” 그렇다. 한 인생에 대한 평가는 년 수와 눈에 보이는 업적으로만 계수할 수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고인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이었으며 실제 삶은 어떠했나? 등을 복합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루비 캔드릭 선교사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삶을 산 믿음의 모델이 아닐 수 없다. 그 척박한 시대에 혈혈단신 여자로서 누가 감히 선교사로서 조선 땅에 올 수 있었겠는가? 뿐만 아니라 그녀는 우리 민족을 사랑했으며 그 증표로서 자신이 조선 땅에 묻히기를 바랐다. 꽃씨처럼 장차 이 땅에 복음의 꽃이 필 환상을 안고서!
맺음 말
루비 켄드릭 선교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련하다.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낯설고 물 설은 조선 땅에 와 외롭게 뼈를 묻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병사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어떤 영향력을 끼쳤을까? 하지만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더 아름답고 영롱한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 그녀가 떠난 지 115년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 하늘나라에서 복음의 씨가 발아해 조선 땅을 덮고 오대양 육 대륙으로 그 꽃씨가 날아가고 있음을 보고 있을까? 한 알의 밀알 원리는 이처럼 숭고하고 위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과 부활의 계절에 루비 선교사의 일생을 생각해보며 뭔가 새로운 결신이 필요하다. 그간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장차 “내 묘비에는 무슨 말이 쓰여 지기를 원하는가?”
jrsong007@hanmail.net
04.0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