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25시”란 무엇인가? 이 말은 원래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기우(Gheorghiu, C. V.)가 1949년에 발표 한 소설 “25시”에서 유래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농부 모리츠를 통해 나치스와 볼셰비키의 학정과 현대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여기서 “25시”란 하루 스물네 시 다음의 시간으로서 이미 지나 버린 불안과 절망감을 상징한다. 그런데 과거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 “25시”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는 24시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매우 바쁘고 분주한 삶의 의미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비근한 예로 매스컴에 “사건 25시, 추적 25시, 패트롤 25시, 특파원 25시, 연예가 25시” 등이 있다. 이처럼 현대인은 시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 정해진 시간을 누가 더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생도 승패가 갈린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한결같이 촌음(寸陰)을 아끼며 살았다. 세월을 낭비하면 불행하게 된다. 시간은 냉엄하며 멈춤이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함몰시키는 위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늘 깨어서 인생을 계수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선교사는 더욱 그러하다.
1. 유한한 인생 (80 =701,280시간)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인생여백구과극(人生如白駒過隙)이란 말이 있다. 그 뜻은 인생은 문틈으로 백마가 달리는 모습을 보는 것같이 삽시간에 지나간다."라는 것이다.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는 인간의 평균수명을 80년으로 잡고 일생동안 항목별로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는지에 대한 기사를 게재된 바 있다. 80년은 701,280시간이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700,800시간에 윤달인 해 20년X24시간=480시간을 더하면 된다. 그중 가감할 수 없는 생리적 욕구인 “수면(성적 욕구 포함)은 하루 8시간 11분으로서 총 239,000시간이며 약 27년에 해당된다. 음식 섭취는 하루 1시간 48분으로서 총 52,560시간=6년이다. 화장실 사용은 하루 54분으로서 26,280시간=3년에 해당된다. 이를 합산하면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생리적 욕구를 위해 총 317,840시간(36년)을 소모하게 된다. 이는 인생의 45% 시간 분량으로서 가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얼마인가? 80년 인생살이 701,280시간에서 생리적 요구인 317,840시간을 뺀 383,440시간(44년)이다. 따라서 인간은 임으로 가용할 수 있는 383,440시간(55%)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도 판이하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생리 욕구적 시간은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적용되지만 나머지 시간은 얼마든지 상대적으로 선용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2.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탄생된 계기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세묘뇨프 광장은 군인들과 많은 구경꾼들로 북적거렸다. 임시로 설치한 사형(死刑)대 위에는 반체제 혐의로 잡혀 온 28세의 청년이 다른 동료들과 함께 묶여 있었다. 집행관이 소리쳤다. “사형 전 마지막 5분을 주겠다.” 단 5분! 사형수는 절망했다. “내 인생이 이제 5분 뒤면 끝이라니, 나는 이 5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먼저 가족과 동료들을 생각하며 祈禱(기도)했다. “먼저 떠나는 나를 용서하고 나 때문에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집행관은 2분이 지남을 알렸다. “후회할 시간도 부족하구나! 난, 왜 그리 헛되게 살았을까?” 마침내 집행관은 마지막 1분을 알렸다. 사형수(死刑囚)는 두려움에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서운 칼바람도 이제 느낄 수 없겠구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겠구나, 모든 것이 아쉽구나!” 그는 처음으로 느끼는 세상의 소중함에 눈물을 흘렸다. “자, 이제 집행을 시작하겠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멈추시오, 형 집행을 멈추시오!”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형장(刑場)으로 달려왔다. 사형 대신 유배를 보내라는 황제의 급박한 전갈이었다. 사실 황제는 젊은이들을 처형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혁명 놀음”을 하겠다고 설치는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처형 쇼를 한 거였다. 아무튼 내막을 모른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는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 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 간 유형생활을 마치고 이어서 4년의 군대 복무를 했다. 비로소 자유인이 된 그는 인생을 "5분의 연속"이란 각오로 1881년 2월 9일 눈을 감을 때까지 글쓰기에 전념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문호가 이렇게 탄생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사형수로서의 체험이 없었다면 남은 생애를 25시적 긴장감으로 살지 않았겠고 “죄와 벌”같은 불후의 명작도 없었을 것이다.
지도자는 비범(非凡)해야 한다.
25시란 물리적 시간 체계를 뛰어넘는 꽉 찬 삶을 의미한다.
주의 일은 늘 깨어 세상을 앞질러 가야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있다.
3. 이십오시를 살 수 있는 삶의 비결
로마제국 시대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말했다. “인생 자체가 짧다는 생각은 틀렸다. 인생은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짧아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생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을 보면 3종류 삶의 형태가 있다. 세월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어 가는 사람, 아예 뒤쳐져 끌려가는 사람, 물리적 시간을 앞질러 가는 사람이다. 역사에 자취를 남긴 위인들 대다수는 정해진 시간을 초월하는 밀도 높은 삶을 살았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첫째 인생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 “내가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목표가 없는 사람은 바람에 나는 겨처럼 방황하게 되어 있다. 둘째, 목표를 향한 치밀한 계획이 요구된다. 아무리 인생푯대가 분명하다 해도 구체적 설계가 없으면 기대치에 접근할 수 없다. 셋째, 의지적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행함이 없이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만 하면 역사의 진보는 없다. “생각은 신중하게, 결단은 단호하게, 행동은 신속하게” 앞으로 나가야 한다. 넷째, 틈틈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일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다보면 때로는 좌표를 잃고 엉뚱한 곳을 향하기도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자기와 사역을 체크함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와 같이 4가지 삶의 방식은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특별히 사역적으로 요긴하다. 선교 프로젝트는 클수록 그 위험성도 비례한다. 선교사는 타 문화권에서 언어적 한계, 문화적 한계, 지식적 한계, 체력적 한계, 재정적 한계, 시간적 한계 속에 있다. 그러므로 늘 영이 깨어서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덧입으며 하루 25시를 산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도 모르게 세속에 떠밀려가기 쉽다. 모름지기 주의 일을 하는 자는 비범하지 않고서는 소기의 성과를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맺음 말
우리에게서 25시란 무슨 의미인가? 이는 매일 한 시간이 더 필요할 정도로 충실하게 살아가야 할 미래 지향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숨겨진 시간이다. 똑같은 하루지만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를 가져온다. 성경은 인생이 강건하면 80년이라 했다. 이는 701,280시간이다. 이중 1/3시간은 일생동안 잠을 잔다. 실제로 깨어서 활동하는 시간은 일생의 3분의 2에 해당 된 셈이다. 무엇보다 생리적 요구인 317,840시간(36년)을 뺀 나머지는 383,440시간(44년) 뿐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인생이 얼마나 짧은가? 생명의 끝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자 앞에서 늘 겸허해야 한다. 그 한 방편은 인생을 계수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25시적 삶을 영위하게 된다. 사형 일보직전의 체험을 한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러했다. 이로써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와 공동체를 위해 세월을 앞서가야 한다. 선교사는 영적 지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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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1.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