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왜 일까? 비단 청교도들의 행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간 인류는 1760년 1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1만 여년을 농경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왔다. 북반구 농촌에서 11월은 가을의 끝이요 겨울의 시작이다. 농부들은 이 때 약간의 여유 속에서 햇곡식을 먹으며 일 년 농사를 돌아보게 된다. 현대 21세기는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사회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인간은 문명과 상관없이 기후변화에 영향을 받아 왔다. 따라서 낙엽 지는 지금 추수감사절을 지킨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계절의 여울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악보에서의 쉼표처럼 바쁜 일손을 멈추고 한 해를 계수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는 무엇이었나? 진정 언약백성이라면 감사의 제단을 쌓아야 할 것이다.
1. 추수 감사절의 유래
이 절기는 영국 제임스(James)왕과 영국 국교인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했던 청교도(The Puritan)들로부터 시작되었다. Wikipedia.org/wiki자료에 의하면 “승무원 약 30명에 102명을 태운 180톤짜리 메이플라워(May Flower)호는 1620년 9월 16일 잉글랜드 플리머스 항구를 출발하였다. 66일간의 항해 끝에 11월 21일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州)의 케이프 코드(The tip of Cape Cod)에 입항하였다.” 배는 수리를 거쳐 12월 21일 마침내 플리머스(Plymouth)항에 상륙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신앙대로 가정보다 먼저 회중교회를 세웠다. 이로써 그들은 황금보다 귀한 신앙자유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었다. 오늘의 미국은 바로 이 청교도 신앙의 뿌리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당시 불모지에 도착한 그들은 혹한, 굶주림, 풍토병, 맹수의 공격 등으로 많은 이가 죽고 49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개척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씨를 뿌려 첫 수확의 기쁨을 맛보았다. 청교도들은 추수한 햇곡식과 채소를 하나님께 드리고 인디언들을 초청하였다. 인디언들은 구운 칠면조와 호박파이를 가지고 왔다. 이로써 두 음식은 추수감사절의 대표적 요리가 되었다. 감사의 축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 감사절의 선포문
청교도들은 정든 고향과 본토 아비 집을 버리고 사선을 넘어 이국땅에 정착을 했다. 그 첫 해 씨를 뿌리고 얻은 수확에 대한 감격과 기쁨은 어떠했을까? 극한 고통과 죽음의 고비에서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우러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순례자들이 정착하는지 3년째, 주지사격인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의 감사절 선포문이 새롭다. “위대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금년에 우리에게 옥수수와 밀과 강낭콩과 과일과 채소를 풍성히 내려주셨고, 또한 사냥감이 풍성한 날고기와 조개가 있는 바다를 주셨도다. 또한 우리를 이민족의 밥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고, 흑사병과 각종 질병에서도 목숨을 지켜주셨으며, 또 우리에게 양심을 따라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해 주셨도다.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의 행정관인 나는 1623년 곧 그대들의 순례자 일행이 터전에 상륙한 지 제3년의 11월 29일 목요일에 거기서 그대들의 목사님에게 말씀을 들으며, 이 모든 축복을 인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을 선포하노라.”
3. 감사가 없는 현대인
2022년, 올 해로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온 지 402년이 흘렀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생활환경과 비교해보면 천지 차이가 난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풍요롭고 쾌적한 때가 있었던가? 21세기 현대인들은 놀라우리만큼 좋은 환경 속에서 문명의 이기를 향유하며 많은 소유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감사가 별로 없다. 예배당을 그렇게 많이 들락거리면서도 얼굴은 굳어있고 가슴이 메말라 있다. 동네 어귀를 배회하는 주인 없는 개(Dog)라도 썩은 감자를 사흘만 주면 사람을 알아보고 꼬리를 친다. 헌데 사람들은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 속에 거하면서도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곤 한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이다. 왜 감사가 없는가?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세속적 가치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감사는커녕 신앙이 오히려 삶에 걸림돌이 된다. 본시 인간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감사를 잊기 쉬운 존재이다. 절대자 앞에서 자기 인식보다는 이웃과의 상대적 비교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감사생활은 할 수가 없다.
감사는 영적 건강의 좌표이다.
인간은 감사의 역량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달라진다.
감사(Thanksgiving)는 말로 Thanks 한 후에 뭔가를 Giving하는 것이다.
4. 감사해야 할 이유
첫째는 우리를 하나님 자녀 삼아 주심이다. 주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사망의 덫에 갇힐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십자가 피 값으로 대속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의롭다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다. 이 보다 더 큰 감사 제목이 있을까? 둘째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모든 필요를 채워주심이다. 만일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다면 우리는 문제 많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셋째는 우리를 주님의 일꾼으로 불러주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 우리가 바울이나 아볼로처럼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쓰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이 아니다.
5. 감사에 대한 묵시
미국의 연설가이자 작가인 지글러(Zig Ziglar)는 “나는 감사할 줄 모르면서 행복한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감사는 행복의 원천인 동시에 행복의 열매가 된다. 감사를 계속하다 보면 불평과 불만이 치료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감사는 감사를 불러일으키므로 감사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이다. 감사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모든 사람이 사랑스러워지며 모든 일에 좋은 관계를 이루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감사가 없는 생활은 불행하다. 삶이 무미건조하다. 이웃에게 덕을 끼칠 수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도 없다. 감사가 없는 구도자의 삶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마틴 루터는 "마귀의 세계는 감사가 없다"고 했다. 감사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아첨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은 일상에서 감사가 성품화되도록 의지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어려울 때 감사하지 않으면 더 낳은 환경이 주어져도 감사하기 어렵다. 오늘 여기에서 감사가 없으면 내일 저기에서도 감사할 수 없다. 기적적인 일을 기대하기보다 매일 일상에서 사소한 것에서부터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의 승리란 결코 자기 목적달성이나 정복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항상 감사를 할 수 있는 믿음 그 자체이다.
6. 맺음 말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전기불을 주시고 전기불을 감사하는 자에게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감사하는 자에게 햋빛을 주시고 햇빛을 감사하는 자에게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는 천국의 영광을 비춰 주신다.“고 했다. 감사의 계절이 또 우리 앞에 다가왔다. 우리는 의식을 과거로 환원해 초기 미국 땅을 밟은 청교도들의 믿음과 실상을 회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은 평탄한 중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추위, 배고픔, 질병, 인디언의 위협 등 극한 상황에 내몰렸다. 그러함에도 청교도들은 믿음으로 도전했고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 우리가 만일 그들의 환경에 처해 있다면 어떠했을까? 이 뜻깊은 때에 우리는 금년 한 해 동안의 감사 제목들을 세세히 열거해 보면 좋겠다. 나아가 하나님과 가족 및 이웃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향기 난 감사(Thanks)를 행동으로(Giving) 표현해보자. 그러면 은혜가 갑절로 임할 것이다.
jrsong007@hanmail.net
11.19.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