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역사에서 비극을 배우지 못한다면 어리 석은 것”이라 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적지 않은 교회들이 내면적 본질에 충실하기보다는 외형적 형식과 건물에 치중해왔다. 대표적인 것은 중세교회였다. 유럽에 가면 고색창연한 성당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령의 촛대는 꺼지고 빈 깡통처럼 겉만 번지르르하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 한인교회는 어떠한가?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크게 공헌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속의 논리 속에 맘몬니즘(Mammonism)의 영향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좀 더 크고 쾌적한 예배당 건축 붐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현재 금융당국에 엄청난 채무를 지고 있다. 원금은 고사하고 매월 지불해야 할 이자가 22,000명의 한인 선교사 후원금을 초과하고 있다. 성도들의 피땀 어린 헌금이 이렇게 불탄 검불처럼 하늘로 날아가도 되는 것인가? 우리 주님께서는 안타까운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한인교회는 재정적으로 너무 어렵다. 이때에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 보며 아플 정도로 구조 갱신을 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전투적 교회로서 야성(野性)을 회복해야 한다.
1. 가시적 건물에 치중한 중세 교회
중세교회는 영적으로 암흑기였다. 왜 그러했는가? 교회가 본질을 떠나 외면적으로 치장하는데 대부분 힘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교황의 면죄권이였다. 그것은 11세기 말 십자군(十字軍)전쟁 때 대대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잠잠해졌던 교황의 면죄권(免罪權)은 150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목적을 위해 또 나타났다.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는 즉위하자마자 성 베드로 대성당의 교회 건축을 지시했다. 엄청난 건축 자금이 필요했다. 이때 율리우스 2세가 생각해낸 건 면죄부였다. 그는 1506년에 희년 면죄부를 선포하고, 면죄부 판매로 얻은 수익을 성당 건축 기금에 사용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후임인 레오 10세(Leo.X)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리모델링할 막대한 자금조달을 위해 도미니크 수도회의 한 신부에게 면죄부 판매를 의뢰했다. 그 신부의 이름은 “요한 테첼(Johann Tetzel)”이었다. 교황의 특명을 받은 그는 지옥 불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을 펼쳐놓고 다음과 같이 설교를 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죽은 친척들과 친구들이 여러분을 향해 애원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동전이 여러분의 부모들을 구해낼 수가 있습니다.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에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저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여러 자료에 의하면, 당시 가톨릭 교인들은 연옥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연옥의 형벌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가르쳤기 때문이다. 테첼의 설교를 들은 가톨릭 신자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연옥의 불꽃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앞 다투어 돈을 주고 면죄부를 구입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총 대신 성당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했을 때 중세교회는 타락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소프트웨어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본분 보다 건물이 주가 되면 성령의 촛대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기독 교회는 유람선이 아닌 전투함 같은 성격으로 구조 갱신이 필요하다.
2. 미국 수정(크리스탈) 교회의 교훈
로버트 슐러 (Rev. Robert Schuller)목사는 1955년 자동차 영화관 스낵가게 지붕에서 Drive-in-church 교회를 시작했다. 긍정적인 사고의 힘을 강조한 그의 설교는 많은 호응을 얻으면서 TV 설교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권능의 시간(Hour of Power)”이라는 그의 설교방송은 한 때 130만 명이 시청하기도 했다. 이후 슐러 목사는 그 인지도를 바탕으로 교회 건물을 유리로 짓도록 했고 이름을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로 명명했다. 교회는 1,800만 달러를 들여 3년간의 공사 끝에 1980년 완공되었다. 필립 존슨이 설계한 중앙 성전에는 사각형의 유리 1만 664장으로 볼트 하나 없이 특수 접착제로 부착했으며 건물은 8.0 강도의 지진이 와도 끄떡없게 제작되었다. 내부에는 세계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 중 하나가 설치되었다. 바닥을 제외한 벽과 지붕 전체를 유리로 지은 이 세계적인 건물은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불신자들이라도 구경하고 싶은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2006년 슐러 목사가 은퇴한 후 교회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기 시작했고 2010년 10월 5,500만 달러의 빚을 갚지 못해 파산신청을 했다. 결국 수정 교회 건물과 캠퍼스의 소유권은 2012년 6월 9일 천주교 오렌지카운티 교구로 넘어간다. 5,750만 달러(한화 약 800억원)에 팔린 것이다. 20세기 후반 미국 개신교의 자존심이자 얼굴이며 세계교회의 선두에 섰던 수정교회가 건축한지 불과 32년 만에 이렇게 막을 내린 것이다. 교회 세습으로 인한 내부 갈등, 교인 감소, 세계적 경제위기가 파산의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결과적으로 무리한 건축과 과도한 대출이 수정교회 몰락의 주원인이었다.
3. 세계 선교비를 초과하는 한인교회의 부채 이자율
작금(昨今)의 한인 교회는 어떠한가? 20세기 후반부터 부동산 붐이 일어나면서 교회 건축도 유행처럼 번졌다. 교회성장이라는 명목하에 너도나도 앞다투어 무리한 건축을 시도했다. “번듯한 예배당을 지어 놓으면 성도가 들어오게 되어 있다. 교회가 성도를 모으기 위해 갖춰야 할 제1요소가 편의시설을 갖춘 현대식 예배당”이라는 세속적 인식이 목회자들 사이에 확산됐다. 그것은 필요보다 욕구적인 측면이 강했다. 이로서 많은 교회들이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더 크게 짓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현재 한인교회가 금융권으로부터 받은 대출금이 어마어마하다. 기독교 연합신문의 아이굿뉴스(http://www.igoodnews.net)에 의하면 2012 기준, 한국교회의 금융권 대출 규모는 제2금융권으로 분류되는 상호금융회사에서만 4조 9천억 원으로 파악됐다. 이 밖에 은행권의 대출 규모는 4조원 정도로 나타났다. 따라서 대출 규모가 1, 2 금융권을 합친다면 10조에 육박한다. 연리 5.5~6.5%로 계산할 때, 매달 나가는 이자만 600억이 넘는다. 여기서 주목해 볼 일은 이 통계가 10년 전의 것이란 사실이다. 더구나 5천여 해외한인교회의 부채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2022년인 지금 세계 한인교회가 안고 있는 전체 부채는 얼마나 될까? 이에 관한 통계자료가 없어 유감이다.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보다 눈덩이처럼 더 불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문제는 앞으로이다. COVID19의 영향으로 교회가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부흥은커녕 감소추세에 있다. 이로서 여러 교회들이 대출 부실화에 따른 후폭풍을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원금을 어느 세월에 갚을 것이며 매월 지급해야 할 기백 억 원의 이자는 어떡하란 말인가? 이래저래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맺음 말
교회란 에클레시아(Ekklesia)이다. 이는 ‘로부터’라는 “에크(εκ)”와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클레시아(κλησια)”가 합쳐진 말이다. 이로서 교회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아 모인 무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의 생명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철저히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붙어 순복해야만 한다. 주님의 자리에 인간이 앉아 설치면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게 된다. 초대 카타콤 교회는 철저히 그리스도께 접붙인 바 되어 성결 성을 유지했다. 저들 교회는 건물이 없었다. 계급이 없었다. 안락함도 없었다. 이에 반해 중세교회는 크고 화려한 건물이 있었다. 그 곳에는 종교적 계급이 있었다. 그런데 왜 초대교회는 생명력이 넘쳐났지만 중세교회는 영적 쇠락기를 맞이했을까? 그것은 교회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이며 모든 역량을 어디에 쏟았는가의 차이였다. 따라서 우리 한인교회는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며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것은 중세교회가 추구했던 형식(Form)이나 외형적 건물이 아닌 본분에 메이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종말론적인 선교적 자세를 강조함이다.
jrsong007@hanmail.net
10.2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