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의 7인 (The Cambridge Seven)

송종록 목사

(크로스선교전략 연구소)

1885년 2월 2일. 캠브리지 대학 길드 홀(Guild hall)에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서는 캠브리지 7인의 간증집회가 있었다. 저들을 대표한 스미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땅 끝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빛을 세상에 퍼뜨리지 않으면 영국에 있는 우리도 어둠의 세력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빛마저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당시 부유한 가문의 자녀들로서 전도양양(前途洋洋)한 청년들이 선교사로 간다는 소식은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그 파장은 영국 사회에 엄청난 반향(班鄕)은 일으켰다. 심지어 빅토리아 여왕까지 이들이 쓴 간증집을 읽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 이후 137년이 흘렀다. 지금은 코로나, 4차 산업혁명,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선교도 위기에 봉착해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문제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캠브리지 7인처럼 주님 나라를 위해 청춘을 초개(草芥)처럼 던질 일꾼들을 찾고 계시지 않으실까?

 

1. 찰스 토마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1860~1931 

 

W. Eton College와 Trinity College, Cambridge (B.A.). 찰스는 백만장자인 아버지 에드워드 스터드(Edward Studd)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당시 영국 최고의 크리켓 선수로 인정을 받았고 그 명성과 함께 방황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형 죠지가 위독하게 되면서 세상의 명예와 찬사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무디의 설교를 들으며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다른 6명과 함께 중국 선교사로서 나아갔다. 이후 그는 인도 선교를 하였고 53세가 되던 1913년, 병으로 쇠약해진 몸으로 중앙아프리카로 갔다. 찰스는 그곳에서 18년 동안 선교를 하다 1931년 7월 71세로 사망했다. 이때 7천여 명의 아프리카인이 그의 장례에 참여했다. 그가 세운 “아프리카 심장 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는 WEC 국제선교회(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의 전신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2. 몬태규 헤리 보챔(Montagu Herry Proctor-Beauchamp):1860~1939 

 

Repton School & Trinity College (BA). 교구 목사 준비. 그는 남작의 아들이었다. 보챔은 스미스와 초등학생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같은 조정 팀이었다. 그는 친구인 스미스와 기독학생연합회의 회장이던 키나 스턴 스터드(J. E. Kynaston Studd)의 중보기도 가운데 1881년 그리스도께 헌신했다. 보챔은 중국에서 1911년까지 사역하였다. 영국에 돌아온 그는 영국 육군의 군목으로 일하였다. 보챔의 아들은 아버지를 이어 중국 선교사로 나갔다. 보챔은 1935년 중국에서 사역하는 아들의 선교지에 갔고 1939년에 아들의 선교본부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스탠리 페리 그린 스미스(Stanley Peregine Smith): 1861~1931 

 

W. Repton School & Trinity College, Cambridge (BA). 그는 런던의 유명한 외과의사의 아들이었다. 스미스는 무디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는 않았다. 캠브리지에서 그는 조정(rowing) 팀의 주장이었는데, 조정은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스미스는 키나 스턴 스터드의 영향으로 1880년에 그의 삶을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중국의 북부에서 사역하였으며 1931년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오, 하나님! 영혼들을 구원하옵시고 최소한 2만 5천 이상의 영혼의 짐을 내게 지우소서.”

 

4. 윌리엄 월튼 카슬 (William Wharton Cassels): 1858~1925 

 

Repton School & St. John’s College (B.A.). All Saints, South Lambeth 교회 부목사. 그는 매우 조용한 청년으로 조정팀에 속했다. 카슬은 중국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중국내지선교회(CIM)에 지원했다. 헌데 그의 어머니가 가로막았다. 그녀가 후에는 마음을 바꾸어 허드슨에게 편지를 보냈다. 훌륭한 아들에게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중국의 산시 성에서 출발하여 서부지역으로 갔다. 그는 1895년 중국 서부의 새 교구 감독이 되었고 1923년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5. 세실 폴힐 터너(Cecil Henry Polhill-Turner): 1860~1938 

 

Eton College & Jesus College, Cambridge. 제2 근위기병대 중위. 그는 동생인 아더의 설득 가운데 무디의 집회에 참석하였다. 세실은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영적인 고뇌 끝에 1884년에 그리스도께 생을 바치기로 결단하였다. 그는 1892년 건강문제로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그 마음은 언제나 중국에 있었다. 그는 일곱 번이나 선교지를 방문하였는데 보통 시간을 연장하여 머물렀다. 그는 1908년 영국에서 오순절 운동을 주도하였고 오순절 선교의 리더 역할을 하였으며, 1938년 영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의 영혼을 주님께 맡김으로써 가장 큰 평화와 행복을 얻었으며, 여러분 모두가 동일한 체험을 하시길 권합니다.”

 

6. 아더 폴힐 터너(Arthur T. Polhill-Turner): 1862~1935 

 

Eton College & Trinity Hall, Cambridge (BA). 교구 목사 준비. 그는 캠브리지에 있을 때 무디 집회에 참석하여 예수님을 만났다. 세실과 아더는 캠브리지 7인 중에서 유일한 형제였다. 아더는 목사로 임직 받고 중국에서 계속 사역하였으며 1900년의 의화단 사건 때도 중국에 머물렀다. 그는 1928년 은퇴하고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1935년에 숨졌다. “해외선교를 향한 주님의 인도하심은 매우 점진적이었다.”

 

7.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Dixon Edward Hoste):1861~1946 

 

Clifton College & Royal Military Academy. 포병 중위. 그는 영국 육군 장군의 아들로서 영국왕실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캠브리지 7인 중에서 유일하게 캠브리지 대학 출신이 아니었다. 딕슨은 무디의 집회를 통해 선교사로서 헌신하게 되었다. 딕슨은 후에 허드슨 테일러의 뒤를 이어 중국내지선교회의 대표를 역임하였다. 그는 1935년에 은퇴했으나 1945년까지 중국에 머물렀으며 일본 수용소에 억류되기도 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다음 해 1946년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의 삶은 변했다. 이방에는 복음을 전혀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주님은 그들이 복음을 듣기를 원하신다. 아제 나는 이 일에 나의 생명을 바치리라.” 

 

맺음말 

 

1885년 2월 5일. 열렬한 환송 속에 캠브리지 7인을 태운 배는 영국을 떠나 3월 18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이렇게 시작된 저들의 헌신은 중국에서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 등 다른 나라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것이 1886년 미국에서 발족된 학생자원 운동(SVM)이다. 여기를 통해 20,500명의 청년들이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 사람의 헌신은 결코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저들은 시대를 초월해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가? 그것은 세상의 야망, 권력,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고난의 길, 고독한 길, 영광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변발을 하고 수염을 깎으며 중국옷을 입은 캠브리지 7인은 앞으로도 역사 속에서 빛을 반짝거릴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숭고한 결단과 헌신이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전승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일 가슴속에 울림이 있다면 그 주인공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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