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회집되는 교인 숫자가 곧 성공 목회의 가늠자일 순 없다. 그러나 교인 수=대형교회=성공 목회라는 등식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도 바른 척도는 아니다.
분쟁과 다툼의 현장에서 전도와 부흥의 현장으로 1976년 5월 부임한 충신교회 정황은 대형교회는커녕 중형교회도 되기 힘든 갖가지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분쟁과 다툼, 반목과 갈등은 교회 성장판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그런 교회는 중증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1976년 필자가 부임한 충신교회는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없었고 퇴행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몸살을 앓고 있었다. 목사와 장로, 장로와 장로, 권사와 권사, 교인과교인 어느 한 곳도 성한 데가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시도한 첫 번째 처방은 치유와 회복이었다. 강단과 말씀의 회복을 위해 주일 낮, 밤, 수요기도회, 금요철야기도 그리고 매일 새벽강단을 지키고 말씀을 전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외국과 국내 출입을 10여 년 자제하고 교회를 지켰다. 외래강사를 선별했고 필자가 강단을 지키고 갈무리했다. 꿈을 주고 비전을 회복시키기 위해 설교는 긍정적으로 접근하고 틀을 짰다. 교인들의 내향적 관심과 초점을 외향적인 데로 바꾸기 위해 곧바로 전도운동을 전개했다.
양은 피동성이 강한 동물이어서 자주, 자립, 자생이 용이하지 않다. 이 점이 교인과 비슷하다. 양의 경우 뒤에서 호통 치고 채찍 휘두르면 어디로 가라는 건지 알 길이 없어 우왕좌왕한다. 그러나 목자가 앞장서면 양은 방향 때문이 아니라 목자 때문에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행보를 결정한다. 그런 면에서 양은 순하긴 하지만 다루기는 쉽지 않다. 전도하라, 십일조 드려라, 바로 살아라, 기도하라, 주일 성수하라, 서로 사랑하라! 목사가 앞장서면 실행이 영글지만 언어유희로 치부하기 시작하면 목사의 주옥같은 설교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그래서 설교대로 사는가와 행동하는가의 자문에 어떤 답을 하느냐, 이것이 항상 문제가 된다.
교회 내홍으로 일상을 소진하는 교회를 치유하고 미동도 못하는 성장판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선택한 처방은 ‘전도하자’였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대로 목사가 앞장섰고, ‘하라’가 아닌 ‘하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모일 때마다 제창한 구호가 있었다. 그것은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였다.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 CCC의 4영리 등 국내외의 모든 전도훈련을 쫓아다니며 배우고 익혔다.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그리고 현장에 나가 직접 전도했다. 그것은 바울처럼 필자 자신이 전도자의 삶을 체험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고, 교인들에 앞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당위성 때문이었다. 동부이촌동은 아파트 주거문화가 맨 먼저 시작된 곳이다. 1970년대 동부이촌동 아파트는 승강기 없는 6-7층이 대부분이었다. 전도대를 이끌고 직접 축호전도에 나섰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집마다 복음을 전했다. 주인이 부재중인 집은 현관문에 손을 대고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 이 집 현관문에 충신교회 교패를 붙이게 해주십시오”, “이 집이 충신교회 교우의 집이 되게 해주십시오.”
교회 안에서는 매해 전도목표를 정하고 현관 벽에는 대형 전도 현황판을 만들어 걸고 전도 숫자를 따라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수여했다. 물론 유치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때로 유치하고 어리석은 발상과 접근이 큰 열매를 거두게 해준다. 교회 안에서 고매한 인격을 내세우고 고상한 척 처신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전도하지 않는다. 1백명 모일 때는 2백명을, 2백명 모일 때는 4백명을, 4백명이 달성되면 1천명을, 1천명을 넘어서면 2천명을 목표로 정했고 그 목표가 장년 출석 1만명으로 확대되었다. iamcspa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