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활동 이야기 (3)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총회장 재임시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을 겸임했다. 군사정부가 이어지는 동안 민주화와 사회참여가 KNCC의 정체성을 대표하고 있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고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라는 신학적 양날이 첨예화 할 때 사회구원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의 전통신학과 맞서기도 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KNCC가 전투적 연합체로 각인됐다는 것이다. 예컨대 저항, 반대, 투쟁, 신학적으로는 좌향좌, 거기다 가맹교단의 제한 등 극복해야 할 과제들을 잔뜩 짊어지고 있다. KNCC는 역사와 전통에 비해 한국교회를 설득하는 파워가 약하다. 이유는 조직과 구성이 편향적이기 때문이고, 한국교회를 신학적으로 설득하기 힘든 노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울했던 시대를 벗어나 대한민국이 민주화의 꽃을 피우고 있는 터라 구시대적 저항이나 투쟁이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KNCC의 제한점을 보완하고 명실공히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시작한 것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다.

한기총을 태동시킨 지도자들이 부름으로 필자는 한기총이 출범할 때부터 심부름꾼으로 참여했고 대표회장으로 섬기기도 했다. 한기총은 KNCC에 비해 보수성향의 교단들이 대거 참여하고 기관이나 단체들도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명실공이 한국교회 연합기구로 사명을 다해왔고, 사회 각계각층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구로 발전해 나왔다. 하지만 작금의 한기총을 에워싼 불혀화음이나 분열은 한국교회 위상을 깎아내렸고 선교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을 어둡게 했고, 반기독교세력과 집단들에게 교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있다. 누가 원인 제공을 했든지 어떤 역학이 작용을 했는지 그건 지나간 일이다. 이대로 갈 것인가? 그래도 괜찮은가? 대의를 위해 소의를 내려놓는 결단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힘을 모으고 뜻을 합한다면 재기와 회복의 길이 열리겠지만 이대로 분열의 노선을 고집한다면 훗날 그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불행한 책임자로 낙인될 것이다.

한기총 회장 취임식을 마친 날 오후 첫 번째 행사로 양화진에 있는 선교사 묘역을 예방했다. 낯선 나라에 청춘을 바친 선교사들의 숭고한 선교정신을 기리고 전승해야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이어서 동작동 국립묘지와 부산에 있는 UN군 묘지를 예방했다. 동작동에는 국가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이 그리고 UN군 묘지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UN군들이 잠들어 있기에 예방의 의미가 있었다. 예방의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호병원과 경찰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우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도 실행했다. 한기총을 책임지면서 필자의 생각은 한기총이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일환으로 “한기총 대표회장을 만나러 오는 사람은 다 만나준다. 그러나 만나러 가진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겨로가는 대통령만 제외하고는 모두 한기총을 찾아왔다. 경찰청장, 기무사 사령관, 장차관, 각 당 대표, 국회 대표, 사법부 대표 등 찾는 발길이 많아졌고 그와 함께 한기총의 위상이 높아졌다.

권력과 교회의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지도자가 권력과 결탁한다든지 그 주변을 맴돈다든지 추파를 던지고 자리를 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는 국가를 이끄는 견인세력이어야지 얕잡히고 만만해 보이는 집단으로 추락하면 안 된다. 목사의 대외활동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양 떼를 소홀히 하거나 교회가 퇴행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지금도 필자는 총회, KNCC, 한기총 출입을 피하고 있다. 그만큼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고 출입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곳저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자기 아니면 자동차의 핸들이 꺾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래서 사사건건 끼어들고 매사를 간섭하려 드는 사람들, 만일 그들이 목회자라면 “빨리 목회현장으로 돌아가라, 영성을 회복하고 기도의 무릎을 꿇으라, 그리고 말씀의 능력을 회복하라”고 권한다.

정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꾼은 안 된다. 일꾼은 필요하다. 그러나 트러블 메이커는 필요 없다. 교회다운 교회, 목사다운 목사, 기독교인다운 크리스천의 구현이 주님의 요구이고 한국교회의 바람이다. 그렇게 되는 날 이지러진 한국교회 얼굴은 화사한 봄날 피어나는 꽃처럼 자태를 뽐내게 될 것이다. 그날이 곧 오리라 믿고 기대한다. iamcs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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