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회의란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고 공통점이나 결론을 모아 의결하는 공동체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회의는 두 사람 이상일 때 성립된다. 한 사람의 사색이나 명상을 회의라고 할 수는 없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과 계층이 모여 이룬 공동체인 탓으로 공동회의, 당회, 제직회, 각 부서 등 회의가 많다. 회의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목회를 하다 보면 싫든 좋든 회의를 피할 길이 없다.
회의는 짧게, 기도는 길게
필자의 경우 회의를 즐기지 않는 쪽에 속한다. 목회 진행상 회의를 피할 수도 없고 회의는 싫고 해서 목회를 내려놓는 날까지 고민거리였다. 태생적으로 회의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마냥 회의라면 반색을 하고 자기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다.
모 교회에서 평일 새벽기도회 후에 당회를 모이기로 했다. 당회원의 새벽기도회 참석을 독려하려는 발상도 있었고, 늘 부정적이고 반대를 일삼는 당회원 대다수는 새벽기도회 참석을 못하는 사람들이어서 전략적 의도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날 새벽 해외출장을 떠난 사람을 제외하고 전원 출석이었다는 것이다. 새벽기도회 참석은 못했지만 새벽기도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전원 출석이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회 처방도 특효가 없게 된 셈이다. 그날 아침 당회 진행은 불을 보듯 뻔하다. 새벽 동원에 기분 상한 사람들이 순순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회의는 ‘왜, 무엇을, 어떻게’가 분명해야 한다. 왜 모이는가, 무엇을 의논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진행하는가가 중요하다. 회의는 공공 목적과 유익을 위해 성립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발전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고,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동기가 묻어나야 한다. 개인 감정의 출구가 되어도 안 되고, 각을 세우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려는 때 묻은 의지가 발동해도 안 된다. 회의를 진행하거나 참석하다 보면 부정적인 사람은 늘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은 늘 긍정적이다. 그것은 타고나는 것 같다. 수십 차례 각종 회의 때마다 단 한 번도 ‘좋습니다,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라는 말을 안 하거나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늘 반대하고 딴지를 걸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딴엔 탁월하고 정당한 판단임을 내세우지만 목회에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월간 “목회와 신학” 2012년 11월호는 연말 당회를 작은 특집으로 다루었다. 필자도 “연말 당회 현명하게 진행하라”는 글을 실은 바 있다. 필자 외에 네 사람의 목회자가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당회에 관한 글을 올렸는데 하나같이 당회 회의가 좋다든지, 즐겁다든지, 신바람 난다고 쓴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회의 중 가장 어려운 것이 당회라는 공통된 의견들이었다.
필자의 평소 지론은 ‘회의는 짧게, 기도는 길게’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대표기도가 아니라 개인의 기도시간을 말한다.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거나 개인기도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대표기도가 길다. 마치 모처럼 돌아온 기회를 만끽하려는 듯 그건 못다한 기도 말을 쏟다보면 기도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성경 66권을 차례로 요약해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 역사를 열거하는 사람, 동서양을 넘나들며 세계 문제를 다 다루는 사람,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전반을 섭렵하는 사람, 그들의 기도가 길수록 설교시간은 짧아진다. 그러나 개인기도는 길수록 좋을 수밖에 없다.
필자의 경우 제직회는 30분을 넘겨 본 일이 없고, 공동회의는 10분을 넘겨 본 일이 없다. 예산이나 결산 회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회는 예상을 빗나갈 때가 있고 예상했던 시간을 넘길 때가 있었다. 때론 격론도 있었고, 갑론을박으로 긴장이 높아질 때도 있었다. 그리고 결론을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시차는 있었지만 당회원의 반대나 부결로 사안을 접거나 포기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일단 가결이 되고 나면 어느 누구도 뒷말을 만들어낸다든지 일을 꾸미는 사람은 없었다. 이 점은 지금도 당회원들에게 감사드린다. iamcspar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