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준비(하)

목사는 목회가 우선이다 (중)

요즘은 시들해졌지만 한때 열린예배가 유행처럼 번진 일이 있었다. 한국교회의 경우 열린예배는 젊은이들에게 다가서는 방편이었고 그들을 예배에 참여시켜야 된다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배 형식은 호주, 싱가포르,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몇몇 대형교회들을 모방한 것이었다. 기타, 드럼, 건반악기 등이 동원되고, 설교자의 복장은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고, 찬양은 전통찬송가나 순수 복음성가의 장르를 넘어 세속음악의 유행을 도입했다. 필자는 예배학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예배는 다 열려 있다. 다시 말하면, 닫힌 예배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예배에 동참할 수 있고 예배 장소의 문은 언제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얼마전 미국에서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는 목사를 만났다.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의아스러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젊은이들에게 접근하고 소통을 이루려면 그들의 문화 높이에 자신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다음 날 캠퍼스에서 한국인 학생을 만나 선교사 얘기 끝에 귀고리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그 학생의 대답은 “귀고리 했다고 소통이 되나요?”였다.

티셔츠에 청바지 입고 드럼을 두드린다고 선교의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예배는 예배다울 때 하늘문이 열리고 예배자들의 문이 열린다. 물론 경직된 예배 형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급변하는 청년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도 필요하다. 그렇다고 예배인지 힙합이나 재즈 연주회장인지 구분이 모호한 그런 형식을 도입해선 안된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 설정이다. 예배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모든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고 받으시도록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소위 열린예배의 경우는 ‘어떻게 젊은이들의 요구와 기대치를 만족시킬까?’, ‘어떻게 그들을 기쁘게 할까?’, ‘어떤 프로그램과 진행이라야 그들이 열광할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잘못이다. 구약의 경우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전이었고 제사 드리는 사람과 제사 행위는 모두 ‘거룩함’이었다.

목사는 수시로 예배를 인도한다. 그러나 목사도 예배자여야 한다. 상담도 선교도 교육도 그리고 코이노니아나 섬기고 나누는 것도 예배 다음이다. 그리고 예배 인도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곧 예배 자체는 아니다. 예배 인도는 회중을 예배로 이끄는 것이고,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이기 때문이다.

미국 동부지역 모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5백 여명 모이는 교회니까 꽤 규모가 큰 교회였다.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장로가 매일 밤 안내를 맡고 있었다. 안내 전담 팀장이어서 익숙한 매너로 오는 교인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가 시작된 후에도 예배당 안에 들어오지 않고 안내를 하는가 하면, 예배가 시작되면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가 예배가 끝나면 나타나곤 하는 것이 아닌가? 안내보다 예배가 중요하다. 예배자는 안내하지 않아도 제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러나 구경꾼은 안내자가 없으면 망설이거나 자리를 뜬다.

예배란 하나님께 나아와 그의 성호를 높이고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시간과 횟수가 많을수록 좋다. 그런데 주일저녁 예배를 폐지하는가 하면 수요일 예배도 가정예배로 대치하는 교회들이 불어나고 있다.

필자의 경우 20여 년 전에 내가 은퇴하는 날까지 저녁예배는 존속한다는 것을 선언했다. 저녁예배 대신 오후 3시경 간이예배로 대치하고 귀가하는 교회들의 경우 저녁예배는 부담스럽고 폐지하는 것은 송구스럽다는 생각 때문에 점심 공동식사 후 소수가 모여 예배를 드린다. 그런 예배에 참석해 보면 좌석은 텅 비어있고 남은 사람들은 식곤증으로 졸고 앉아 있다. 예배가 아니라 방편이고 임기웅변이랄 수밖에 없다. 어느 교회는 저녁예배를 폐지하자는 편과 존속하자는 패로 갈려 싸움판을 벌인 끝에 저녁예배를 오후예배로 대치했다고 한다.

필자가 섬긴 충신교회는 주일 낮, 주일 밤, 수요저녁, 목요찬양집회, 금요철야, 산상기도회, 매일 새벽기도회 등 모이기를 힘쓰도록 독려했다. 그럴 경우 피로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은 목회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목회자가 예배를 소홀히 하고 모이기를 게을리 하면, 교인들은 영적 결핍증을 앓게 되고, 교회는 성장 정체현상을 겪게 된다.

충신교회는 한국교회 최초로 목찬(목요찬양집회)운동을 시작했다. 건전한 찬양운동과 그 저변 확대를 위해 찬양학교를 세우고 교재들을 편찬했다. 찬양전문 사역자인 부목사에게 그 사역을 맡겼다. 그리고 훗날 목요찬양학교는 ‘다리 놓은 사람들’이라는 옥동자를 분만했다. 한국교회가 애창하는 상당수의 복음찬양이 충신교회 사역자들과 젊은이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iamcs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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