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준비(하)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목회자의 삶으로부터 시작되는 소통과 변화를 이끄는 설교 현대설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것은 눈높이 맞추기와 소통이다. 설교 대상이 어떤 사람들이냐를 파악하고 그들에게 맞는 설교를 해야 한다. 문제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수준, 학벌, 직업, 성별, 취미 등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소통의 중요성이 있다. 누구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설교, 이해하고 감동적인 삶을 결단하게 하는 설교가 되려면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가 허공을 맴돈다든지 부메랑처럼 설교자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면 그날 설교는 무의미해지고 만다.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누구인가다. 듣는 사람들은 설교와 설교자의 삶과 인격을 대비한다. 자신의 설교대로 살고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는 잘한다. 말은 잘한다. 그러나 설교자의 삶은 그렇지 못다’는 평가가 전해질수록 설교의 영향력은 감소된다. 평소 목회자가 교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수록 그가 전하는 설교의 기대치는 높아진다. 2천석 공간에 5백 명이 모이면 텅 빈 좌석이 된다. 1천석 공간에 3천 명이 모이면 풍성함이 차고 넘친다. 무조건 큰 건물에 여유로운 좌석이 좋은 것은 아니다. 설교 환경은 안정되고 가득할수록 좋다. 모든 교회는 음향기기를 도입하고 설교자의 육성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런데 앞좌석은 잘 들리고 옆 좌석이나 뒷좌석은 잘 들리지 않는다면 그날 설교는 실패작이 되기 쉽다. 음향기기를 점검하고 어느 좌석에 있더라도 그날의 설교를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음향시설을 갖춘 교회들을 둘러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천주교는 예전 중심이어서 메시지 전달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달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도, 설교, 광고 등 전달 매체를 통해야 한다. 소리 지르고 책상을 치는 설교는 구시대적 발상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하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 소통을 이루려면 대화와 설득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대설교에서 일방통행은 감동을 주기가 어렵다.

필자는 그동안 작송하고 선포한 설교 노트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모두 260여 권이 된다. 설교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정직하게 만들고 전해야 한다. 신학은 쉬운 사건을 어렵게 만들고, 풀고, 학문화 하지만 설교는 어려운 사건이나 문제를 쉽게 풀어서 전해야 한다. 그것은 학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사건을 인간의 언어로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슨 소리야? 무슨 뜻이야?’ 라는 사람이 많으면 안 된다. 설교는 현대목회에서 집단 상담과 치유의 몫을 담당한다. 상담은 대부분 일대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대형교회의 경우 개별상담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교를 통해 문제가 제기되고 해답이 선포된다. 그리고 위로와 회복이 이루어지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운동선수는 결전의 날을 위해, 음악가는 연주회를 위해 그리고 미술가는 전시회를 위해 오랜 세월을 바쳐 준비한다. 설교자는 뭇 영혼을 위해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한다. 그리고 그 한 편의 설교 때문에 회개, 감격, 감동, 결단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가 선행되고 그 위에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넘쳐야 한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고 영혼을 깨우는 것은 내 설교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가 그랬고, 한국교회 부흥과 성장을 이끈 선배들의 설교가 그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모든 설교자는 그날 그 설교를 통해 자신이 두드러지고 드러나기를 기대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고 운행하기를 기대하고 기도해야 한다. 설교원고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iamcs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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