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와 스티그마(3)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매사에 웃는 목회란 없다. 웃을 일도 있고 울어야 할 때도 있다. 웃을 일이 겹칠 때 자만에 빠지면 울 일이 뒤를 잇는다. 그러나 울 일이 겹칠 때 마음을 다잡고 겸허한 자세로 두 손을 들면, 웃고 박수 치는 날이 찾아온다. 필자는 목회를 내려놓을 즈음 그리고 목회를 끝낸 후 개별적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섭섭한 감정을 지녔을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 목회자에게 상처를 준 사람, 믿고 신뢰했지만 등을 돌렸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만났다. 지난 세월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하고 두 손을 잡아주었다.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는 적도, 원수도 아니지 않은가? 앙심을 품고 적대할 상대일 수 없다. 대립각을 세운 채 싸움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원수 맺지 말라, 용서하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필자는 타고난 성격이 직선적이면서 비사교적이어서 사람을 대할 때 호들갑을 떤다든지 자기표현의 폭이 좁다. 정당하지 못한 언행은 용납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행위는 결코 수용하지 못하는 편협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고 옮기는 것은 피했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을 다 친구로 사귀진 못하지만 한 번 사귄 친구는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 하나 얻는 데는 오래 걸리지만 잃는 데는 잠시다”라는 명언이 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고’라는 사고의 지배를 받는다면 어떻게 목회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교인 100퍼센트의 지지를 받는 목회란 있을 수 없다. 철인 칸트는 두 인격이 상호적으로 동등한 사랑과 존경에 의해서 하나로 결합되는 것을 우정이라고 정의했다. 세상 떠난 원로목사님은 “목회에 염소는 필요악이다. 그러나 나는 대들고 따지고 시비 거는 그 염소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나 자신을 본다”라는 말을 남겼다. 솔직히 염소 같은 사람은 있는 것보다 없는 편이 훨씬 좋다. 그러나 큰 염소가 사라지면 뒤를 이어 다른 염소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 목회현장이다. 거기서 목사의 스티그마는 깊게 자리한다. 스티그마는 신분과 소유의 표식이었다. 노예는 주인의 소우임을 드러내는 스티그마를 신체에 남겼고, 짐승의 경우 소유주의 이니셜을 몸에 각인했다.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바울의 고백은 자신과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것이고 그의 종이라는 선포였다. 바울은 그 흔적 때문에 단 한 반도 내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한 일이 없었고 자신을 삶을 오직 주님을 위해 그리고 바쳤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종의 자리에서 섬겼고 죽었다.

목사는 누구인가? 주인인가, 종인가? 섬김을 받아야 할 존재인가, 섬겨야 할 존재인가? 섬기는 종이라면 구체적 삶의 정황은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병폐는 종은 없고 주인이 많은데 있다. ‘누가 교회 주인인가? 누가 오너인가? 누가 실력을 행사해야 하는가? 로 편을 가른 채 겨루고 있다. 그리고 힘겨루기에 이긴 사람들은 전쟁영웅인 양 기고만장하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밀쳐내고 승자의 손을 들어주는 내 편 예수를 바라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필자도 그 부류의 한 사람이었다. 섬김 받는 목사, 마음 놓고 지도력을 펴는 목회, 강력한 카리스마를 구사하는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대망이었다. 그것은 예수 목회가 아니라 황제 목회요 군주 목회가 아닌가? 뒤늦게 철이 들어서일까? 죄송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스티그마는 지울 수 없는 특징을 갖는다. 한 번 종은 영원한 종이다. 세속정치는 종이 군왕이 디고 황제가 되는 길이 열려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는 그런 질서가 없다. 지울 수 없는 스티그마가 웅변한다.. ‘너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종이 주인 행세하려는 것은 꼴불견이다. 종은 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주인 되신 주님을 향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소리 높여 고백해야 한다. “주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나는 주의 종입니다.” iamcs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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