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와 건강(1)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쉼없이 달려온 길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다. 육체가 허약하면 정신이 흔들리고, 정신이 흔들리면 육체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목회를 정신노동이라고 부르지만 따져보면 체력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예배, 설교, 심방, 상담, 행정, 선교, 교육. 그 어느 것 하나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성공이 어렵다. 필자의 경우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질이 강골도 아니었고 체력도 장사가 아니었다. 거기다 영양공급 부실로 허약한 유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청년기는 고달픈 고학생활의 연속으로 기를 펴지 못한 채 보내야 했다. 신학교를 졸업하면 교회의 청빙을 받고 고생이 끝나려니 생각했지만 필자를 초빙한 교회 여건은 예우가 너무나 부실했다. 다시 말하면, 고생이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필자 나이 32세 되던 해 부목사 생활을 접고 호남 굴지의 교회인 양동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형뻘 되는 장로님들이 최선을 다해 필자를 섬겨주었지만 처음 맞은 단독목회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경험 부족에다 생소하고 버거운 목회는 필자를 억누르는 돌덩이 같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기도회 인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 저녁 12시가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대소 심방도 승용차가 없던 때여서 걷거나 버스를 이용했고, 주일 낮밤 예배 설교, 수요일, 금요일 기도회 설교, 심방설교, 돌잔치, 생일잔치, 회갑잔치, 결혼식, 장례식 등 하나에서 열까지 담임목사가 져야 할 특권이었고 짐이었다. 피로가 누적되면서 소화불량 증세에 두통이 겹치고 불면증 증세까지 가세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목회는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교회가 성장하고 예산이 배가되고 여기저기서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첫 목회여서 유연성은 없었지만 물불 가리지 않고 달음질한 목회,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고 보람차다.

목회지를 서울로 옮긴 뒤의 목회생활은 지방목회에 비해 훨씬 더 각박하고 고단했다. 이유는 교회가 내분과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백여 명 남짓한 교인들이 마치 청백팀인 양 나뉘어 사사건건 맞서는 꼴은 가관이었다. 그 틈새에 끼어 균형을 잡고 조화와 조율의 장을 마련해야 하고 교회 건축의 짐을 져야 했다. 그리고 교회 성장의 과제를 풀고 한계의 벽을 넘어야 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하나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고 교회 성장축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자에게 돌아온 것은 과로와 스트레스 여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충신교회 목회는 2010년 말 목회를 내려놓는 날까지 안식년 한 번 없이 계속됐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대형교회를 일궈낸 것도 아니고, 성공 목회의 표지판을 세운 것도 아닌데 35년 세월을고스란히 바쳤다. 필자가 지킨 가장 큰 목양원칙이 있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화려한 교회, 폼나는 목회자 밑에서 훈련 받은 일도 없고, 신학과 학문의 세계에도 일천한 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최선목회였다. 자녀들에게 일러준 가훈도 ‘최선을 다하라’였다.

말씀 선포와 강단 지키기에 최선을 다했다. 함부로 강단을 내돌리 않고 지켰다. 외래강사를 아무나 세우지 않고 필자의 목회철학과 방향에 도움 될 사람들을 선별했다. 열린음악회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출연자들을 고도화하고 선별한다. 하물려 목양 강단에 아무나 세월 수는 없다. 그래선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 날도 새벽기도를 인도했고, 주일 낮과 밤, 수요일 저녁, 목요일 연합 성경공부, 금요일 구역장 교육, 금요일 저녁 철야기도회도 직접 인도하고 이끌었다. 헌신예배 강사로 나가는 일, 부흥회 인도, 세미나 강사 등 외출을 삼갔다. 그것은 목회자인 필자 중심으로 교회가 자리를 잡아야 하고 성장 동력의 중심축이 목회자여야 했기 때문이다. 휴가도 안식년도 반납하고 오로지 목회에만 올인했다. 되돌아보면 미련하고 우직스런 목회일생이지만 후회는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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