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신호 (민수기 22:21-34)

박근재 목사 (시나브로교회 원로목사)
박근재 목사

(시나브로교회 원로목사)

애굽에서 나오게 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던 이유로,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도움과 보호하심에 힘입어서 마주치는 이방 족속마다 파죽지세로 물리치면서 계속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합니다. 드디어, 애굽을 떠난 지 40년 만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복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인 요단강 동편 모압 평지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평지에 이르자, 그 지역의 모압 왕 발락은 아주 심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변 ‘브돌’이라는 지역에 사는 점치는 복술가 ‘발람’을 불러오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 고대인들은 복술가나 마법사들의 주술을 통한 저주가 초자연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저주는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바로 이런 상황인데, 하나님께서는 복술가인 ‘발람’에게 나타나셔서 ‘발락’ 왕의 초청에 응하지도 말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세요(12절). 그래서 발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모압 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13절). 그러나 모압 왕은 지위가 더 높은 귀족들을 그에게 한 번 더 보냅니다. 그리고 그를 또 한 번 더 설득하는 데 특별히 17절에서는 모압 왕이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세상 최고의 명예와 권력도 아낌없이 제공하겠다는 의미이지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발람은 모압 왕의 이 같은 제안을 재차 거절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낱 이방 신에 지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발람의 순종은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발람도 내심으로는 모압 왕의 제안에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을 알수 있어요. 왜냐하면 만일, 발람이 모압 왕의 제안을 재차 거절할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번 모압 왕의 사신들에게 전했을 텐데 그보다는 오히려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겠다’(19절) 고 말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내심 모압 왕의 제안에 현혹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세요! “일어나 함께 가라”(20절).

자! 여기서 하나님의 반응이 조금 이상합니다! 12절에서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20절에서는 “일어나 함께 가라”고 말씀하세요. 앞뒤가 맞질 않는 말씀을 하고 계세요. 그 이유가 뭘까요? 왜 그러셨을까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딴 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경고를 하셨고 22절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어요.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결국, 발람은 역설적으로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의 사신들과 함께 가게 됩니다. 그러자, 발람의 이중적인 행태로 인하여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그의 가는 길을 막으십니다(22절). 그런데 안타깝게도 발람은 탐욕스러운 욕심 때문에 영안이 어두워 보질 못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발람을 태우고 가던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손에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무서워서 밭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를 보지 못하고 애꿎은 나귀만 채찍질합니다(23절). 그러자 나귀가 담 쪽으로 피하다가 발람의 발을 다치게 하자 또다시 채찍으로 나귀를 때립니다(25절).

여러분! 발람은 나귀가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데만 화를 내고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하고 있질 않아요. 결국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나귀를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막아서지요. 그러자 나귀는 끝내 발람의 발 앞에 주저앉아 버리고 맙니다. 이번에도 역시 발람이 나귀를 지팡이로 때려요(26-27절). 마침내 참다못한 나귀가 이제는 자기가 직접 입을 열어 발람에게 말합니다. 동물이 말하는 희귀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어요(28절).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30절).

그때야 발람은 하나님 사자의 모습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그 앞에 엎드립니다(31절). 그리고 고백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34절).

여러분!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자기 나귀가 생전 보여 주지도 않았던 이상한 행동을 했을 때, 발람은 “왜? 이런 평범하지 않은 일이 나에게 벌어졌을까?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 알려 줄 말씀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 보지 않았냐는 거예요. 나귀가 말하는 이런 특별한 사건 앞에서 발람은 일단은 멈춰 서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뭔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 것 아닐까?”라고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았겠냐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더더욱 안타깝고 답답한 것은 우리들도 이 같은 실수를 하나님 앞에서 자주자주 반복한다는 거예요. 원하는 곳에 가거나 혹은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할 때, 이상하게도 어떤 장애나 문제가 발생해서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우리는 마치 발람이 나귀에게 했듯이, 어려움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면서 분노를 퍼붓는다는 거예요. 예상치도 못했던 문제들이 앞을 가로막을 때, 그래서 자신의 계획과 생각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그 문제나 상황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살피기 보다는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먼저 내뱉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눈으로 보지 못한다는 거예요.

1902년 카리브해의 한 섬에서 화산이 폭발했어요. 화산 분출물과 유독 가스가 8킬로나 떨어진 도시를 30초 만에 덮쳤어요. 무려 3만여 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현장 근처에서 죽은 동물은 고양이 단 한 마리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1923년 일본 요코스카 인근 해안 수면에 어느 날, 수천 미터 깊은 바다속에 사는 물고기가 갑자기 떠올랐고 그 이틀 뒤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이 같은 재해를 미리 감지할 수 있었을까요?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이들만의 ‘육감’과 ‘직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즉 이들은 자연 재난에 대한 이들만의 예민한 ‘예지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만의 ‘육감’과 ‘직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만의 ‘예지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발람은 이방 선지자니까 설령 하나님에 대한 ‘육감’과 ‘직감’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지능력’이 없다고 치더라도,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도 미처 보지 못한다고하더라도,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아버지로 믿고 고백하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당연히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예민한 ‘예지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운전자가 차를 안전하게 몰기 위해서는 신호등에 예민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이 인생의 차를 안전하게 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신호’에 예민해야 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여러분의 생각과 계획과는 달리 계속해서 삐걱대고 어긋나기만 하십니까? 여러분의 통상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자꾸 똑같은 일이 이상하리만치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바로 그때, 바쁘게 가던 인생의 길을 잠깐 멈추고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일러주실 말씀이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뭔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지는 않으실까?’ 한 번쯤은 심각하게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호’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영적인 촉각을 날카롭게 세운 하나님 자녀의 신앙과 삶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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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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