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One Church)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현대인)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떠신가요? 행복하세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얻는 복은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가난한 마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의 가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물질의 가난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물질이 가난하면서도 마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물질은 부유하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랍비라고 불리우는 자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계급과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한 무명의 나사렛 청년이던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물음을 던질 만큼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아무도 예수님께 관심을 두지 않았들 때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새 무덤에 모실 만큼 그 또한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던 빌레몬은 골로새 도시에서 부자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듣고 신앙을 소유하면서 자신의 집을 예배의 처소로 내놓을 만큼 마음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둘째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심지가 약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이라고 할 때 우리는 쉽게 놀라며, 매사에 부정적이며, 옹졸한 사람을 연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는 이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셋째로, 가난한 마음은 외식하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꾸민 겸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은 외식입니다. 허리를 굽히는 것이 겸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과연 가난한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저와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앞에 심령이 가난해져서 주님이 약속하시는 참 행복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가난한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에 대한 예로 성 어거스틴의 예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어느 날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덕은 무엇입니까?”
어거스틴은 “첫째는 겸손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둘째도 겸손이다”, “그럼 셋째는 무
엇인가요?”, “셋째도 겸손이다”, “그러면 겸손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이다”
제자는 다시 묻습니다 “선생님 교만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극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학자 앤드류 머레이는 이와 비슷한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겸손을 잃어버린 것이다”
누구든지 이 교만의 죄를 짓지 않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 사람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나 너나 할 것 없이 다 교만한 마음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우리에 대한 평가를 우리가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난한 마음을 갖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본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의 눈에 비추어진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며, 다른 한 사람은 세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들어와서 얼굴을 들고 아마도 두 손까지 들고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옵기는 나는 토색도 한 일이 없고, 불의한 일을 하는 일도 없고 간음을 한 일도 없고 또한 저기 앉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드렸고 모든 얻은 바의 십일조를 다 드렸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성전에 들어왔지만,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서 오직 가슴을 두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를 “하나님이시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말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기의 죄인 됨을 발견하는 철저한 죄인의 인식은 가난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여기서 ‘가난’이란 말의 뜻은 프로코스 πτωχοι 란 단어로 ‘철저하게 가난하다’라는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 가난을 뜻합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자비에 의존하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철저한 가난으로 이러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누구든지 다 문자 그대로 거지입니다. 우리는 벗은 몸으로 세상에 왔습니다. 문자 그대로 무엇을 가졌든지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겸손해야 하느냐 하면 내게 있는 게 없으니까 겸손해야 합니다. 즉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있는 것 때문에 또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드신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우리의 마음에서 있어서 나오는 것들이 더 더럽다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같이 우리의 죄악을 인식하는 자기 인식에서부터 가난한 마음은 시작됩니다.
가난한 마음은 치료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상태는 발견하였지만, 남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도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강할수록 남의 도움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도 죄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마음이란 밖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겸손히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치료를 수용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기대에 응답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붙드시며 우리에게 기대를 거십니다. 그 기대 속에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며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줄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이 몰래 숨어서 보잘 것 없던 기드온에게 나타나셔서 “큰 용사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오늘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오 놀라운 하나님의 위인이여!” 라고 부르신다면, 우리는 “아이고 주님, 뭔가 착각하셨겠죠”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대입니다.
예전에 베드로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시고 그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그렇습니다. 너는 반석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가난한 마음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주님으로 채우고자 응답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반면에 주의 손길 대신에 자기 의로 굳어진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상처를 싸매시며, 치유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을 모시는 심령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마음 이것이 바로 가난한 마음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스스로 마음을 점검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또한, 나는 내 이웃을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내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또한 이웃들 모두를 주님은 받아주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잘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주님은 여러 상황과 환경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뜻만을 위하여 살아가고 계십니까?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잘 받아들이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장점을 알고 단점도 압니다.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다고 말하며,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인정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약속하시는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못하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된 복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천국을 장소적 개념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천국이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의 주권이 미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 모든 곳을 하나님이 다스리시지만, 그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한다면 하나님은 그 곳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지옥입니다. 거기는 천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기적을 베풀지 아니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곳에서 역사하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우리의 가정에 복 주시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그 곳에 사단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사단이 그곳에 역사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시면, 사단이 그곳을 다스릴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현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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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