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죽음

신명기 34:1-12
이영진 목사

(KAPC 동남부노회 부노회장)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는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은 끝이나 종말이 아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일평생을 살았는지 하나님께서 살펴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을 흔히 한 편의 연극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연극 무대에 올라갈 때는 사명을 받아 수행하는 때요, 무대에서 자신의 배역을 다하고 내려올 때는 인생의 여정에서는 죽음이나 은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물러나는가, 죽음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 430년 동안의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요 최초의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감당하고 수행한 사명에 대해 성경이 이렇게 의미를 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신 34:10-12)

40년간 광야 속에서 지도자의 사명을 잘 수행한 모세는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 가나안인데 이를 목전에 두고 죽게 됩니다. 기력이 쇠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모세의 죽음을 통해 무대 위에서 내려간다는 것의 의미를 나누기 원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것의 의미는 첫째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를 율법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모세가 가나안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들어갔다면 율법을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해석이 됩니다. 성경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진다고 말씀하는데 이것과 배척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신약성경 갈라디아서는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며 율법을 몽학선생(초등교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 3:24,25) 

창 15:6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람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 3:27,28)고 했고,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고 오직 믿음과 은혜를 통한 구원을 말했습니다.

둘째, 모세의 죽음은 공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랍 벨의 저서 『사랑이 이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그는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고 사람들을 지옥 형벌에 떨어뜨릴 수 있느냐”고 주장합니다. 이에 코너스톤 교회를 개척한 프랜시스 챈 목사는『지옥은 없다?』는 책을 통해 반박했습니다. “지옥은 있으며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만 죄를 미워하시고 보응하신다”는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는 미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출애굽 1세대가 모두 죽고 다음 세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이유는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열 사람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난 뒤 부정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을 선동하자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대적하고는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한다고 했을 때 그들의 정탐 기간 40일을 40년으로 계산하여 출애굽 1세대인 20세 이상 된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불순종한 대가였습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당시 20세 이하의 이스라엘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만, 불평은 지도자 모세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이 없어 원망하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을 주라 명하셨습니다. 그때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므리바 물 사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을 나타내지 않은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에 들어 갈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 공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지만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세상을 대신해 화목제물이 되신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 사랑과 공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랑과 공의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사건은 다음에 설명드릴 이유와 관계가 있습니다.

셋째는 모세의 죽음을 통해 해석과 적용이 가능할 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만약이란 가정이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만약에’ 모세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긍정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부정적인 면이 더 많았을 겁니다.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에 입성하자마자 주변의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세를 살아있는 우상으로 만들었을 겁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체험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는 시퍼런 홍해가 길을 막고 있었으며 뒤에는 바로의 강력한 병거들이 좇아오고 있었습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가운데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모세가 바다를 향하여 지팡이를 들고 손을 내밀자 바람이 불어 바다에 길이 열렸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에는 반석에서 샘이 터지게 하였고 에돔 땅에서 길이 험하다 불평불만 하다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구리로 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마다 살게 하였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모세가 40일 만에 나타나 산에서 내려왔을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30)

모세는 애굽의 바로 앞에서 10가지 이적을 행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왔고,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이적을 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있던 지도자 모세, 하나님의 대언자였지만,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의지했던 모세였지만 백성들의 눈에는 항상 모세가 보였으니,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가나안 땅에 함께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눈에 보이는 살아 있는 우상이 되었을 겁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만류해도 백성들은 모세를 칭송했을 것이고, 높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행히도 모세가 죽은 뒤에 그의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모세의 무덤이 발견되었거나 알려졌다면 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모세의 무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자손손 성지가 되었을 겁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후의 자손대대에 걸쳐 모세의 무덤을 찾으며 모세를 숭배했을 겁니다. 이 모세의 죽음과 모세의 무덤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오직 우리의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그분만이 높임을 받으실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과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하나님께서는 대본을 쓰시는 작가이시자 총감독이 되시고 성령님은 우리 인생의 연출자 십니다. 그 무대에서 예수님이 맡으신 배역은 주인공이십니다. 예수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셔야 하고 예수님만 돋보이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주인공이심에도 그 연극의 무대를 사사롭게 주름잡지 않으셨습니다. 각본가이자 작가이며 감독의 계획과 명령에 따라 등장하실 자리에 등장하셨고, 잠시 무대 뒤로 물러가셔야 할 때 물러가셨습니다. 무대 뒤로 물러가셨다고 주인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무대와 관객은 오직 주인공의 등장만 기대해야 합니다. 나머지 엑스트라와 배역은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해 충성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는 자신이 무대 뒤로 가야 할 시점이 되자 아무 말 없이 물러갔습니다. 물러갈 때 아쉬움이 없었겠습니까? 회환도 있었을 것이고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아 하나님께 한 번 더 간청할 수도 있었지만 모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주어진, 정말 말 많고 원망 많고 불평이 입에 항상 붙어있는 사람들의 지도자 배역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명이 다하자 무대 뒤로 조용히 내려 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배역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일할 때는 열심히, 사라질 때는 무대 뒤로 조용히”와 같은 자세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 지금까지 왕성하게 전파된 것은 하나님의 쉬지 않고 일하심과 그 배후에서 열심히 일하며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진 무수히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열심히 주의 복음을 전하다 “무익한 종입니다 주님만이 존귀케 되기를 원합니다. 다만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물러갈 때를 알고 물러나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에 분쟁이 생기기도 하고 ‘나 여야만 한다.’는 교회 지도자들 때문에 교회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의식’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주장일 뿐입니다. 주님보다 앞서는 교만은 없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신 34:4,5)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순종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믿음과 철저한 순종 그리고 들어가고 빠질 때를 확실히 아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열심을 감당하되 퇴장할 때는 모세처럼 말없이 무대 뒤로 물러섬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드러내고 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님만 돋보이게 하여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다시 한 번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ylee9211@gmail.com

03.0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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