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듬히 그러나 받쳐주며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이동진 목사

(성화장로교회)

팬더믹이 앤더믹으로 접어들고 이젠 마치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다. 마치 지구멸망의 시대를 보여주는 영화처럼 살았던 팬더믹의 날들이 사라져버리고 이젠 다시 괜찮다, 안전하다, 평안하다라는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이 살고 있다.

빌 게이츠는 팬더믹이 지나간 후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대단히 큰 시련에 직면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반적으로 세상이 더 나아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위기 동안에도 결국 우리는 지나왔어요. 향후 10년 안에 우리는 제조가 쉽고 여러 종류의 호흡기 병원체 감염을 장기적으로 막아 주는 차세대의 백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더욱 발달된 유전체 기술로 바이러스를 빠르게 감지하고 즉시 억제할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의료, 기후 등 여러 영역들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이 세상은 현재보다 더 낫게 만드는 놀라운 혁신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빌 게이츠가 한 이 말은 많은 이들에게 ‘우리들의 세상’은 계속 더 발전하고,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가지도록 했다.  

정말 그런가?  세상의 어떤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인가?  좋다. 그 말이 맞아들어가면 좋겠다.  비관보다는 낙관이 우리를 얼마나 편안케 할 것인가?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살아보자, 그렇게 되도록 살아보자”고 빌 게이츠의 주장에 보조를 맞추어주고 싶다. 솔직히 그런 세상이 오기를 내심 기대하면서, 그 중심에 교회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덧붙여본다.

그런데, 교회를 보니까 그 낙관론으로 바라볼 수 없는 현실이 펼쳐져 있으니 옛 시조의 마지막 연 앞에 외치는 "아흐, 오호라, 통재라...."라는 탄식이 나온다.  한 기독교신문의 주요 기사 제목들을 보자.  'OOO총회장 불륜 의혹 파장, 모 선교회 간사, 간음 추행 2심도 유죄, OOO목사 성폭력 의혹, 설교 표절, 교회는 분열'...  

이단 교주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사건화 된 이야기만이 아니라 교회들마다 교단들마다, 기독교단체들마다 숨기고, 숨겨지고, 감추고 싶은 아프고 화나고 슬픈 이야기들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교회는 빌 게이츠의 낙관론에 조용히 붙어있으면 될까?  아무리봐도 ‘전반적으로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물론 교회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비관론으로 세상을 본 적이 없다.  성경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낙관(樂觀)이기 때문이었다.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온 우주의 통치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낙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2천년 신앙을 지켜온 것이 아니라, 그 신앙을 보호해준 교회가 그리스도인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지켜주셨다는 믿음이 있기에.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 16:6)”는 하나님의 말씀 뒤에 이어오는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믿기에 불안함 가운데서도 고른 숨을 쉬고 있다.

어느 장로님의 고백이다. 어느날 중학생 아들이 질문하더란다. “아빠는 내 영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세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 앞에서 당황한 50 초반의 이 아빠의 아들은 중학교를 자퇴했다.  그러나, 이 아빠는 수년이 지난 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 질문은 아빠인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일하셨고, 아들은 방황 후 자신만의 자리에 돌아왔고, 아빠인 저는 그동안 완전히 변했습니다.”

칼럼 몇 줄로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래서, 이 칼럼의 오늘 마무리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마치려 한다. “교회인 나는 한 영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길이 휘휘 돌아다니는 여행자의 걸음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생각하며 걷는 순례자의 걸음이 되길 바라며, 아빠나 아들이나, 목사나 성도들이나 너나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가 서로 기댈 나무가 되어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잘 찾아가기를 바라면서 정현종의 시 <비스듬히>의 마지막 줄을 읽어본다.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djlee7777@gmail.com

07.2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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