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위야인는 알제리 북부 아틀라스 산맥의 오르 고원에 주로 살고 있는 베르베르 목자들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 북아프리카 전 지역을 "마그리브"(Maghrib)라 부른다. 3세기에 로마인들은 이 마그리브의 사람들을 "베르베르"(Berber)라고 불렀는데 이는 "야만인"이란 뜻이다. 베르베르족은 자신들을 "자유롭고 고상한 사람들"이란 뜻으로 "이마지겐"(Imazighen)이라고 지칭한다. 이 말은 베르베르인의 정체성과 민족주의를 가리켜주는 지시어가 되어왔다.
아틀라스 산맥의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봉우리들은 오랫동안 베르베르인들에게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이 거친 산들은 로마인, 반달족, 비잔틴인, 그리고 아랍인들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줬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서기 670년과 700년 사이에 마그리브를 정복했다.
이민이 베르베르인들 사이에 점점 더 흔한 일이 됐으며, 현재 수백만이 유럽 도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거의 173,000명의 샤위야 베르베르인들이 프랑스로 이민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유럽노동시장은 새로운 노동자들에 대해 문을 닫아버렸다.
삶의 모습
샤위야인은 알제리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보호하기위해 일어났던 여러 베르베르 집단 중의 일부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억세고 검소하며 친절하고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자부심이 강하고 민첩하고 끈질기며 충성스럽다고 알려졌다. 특히 독립에 대한 열망이 그들의 문화에 깊이 깔려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샤위야인들은 양과 염소들을 주로 기르는 반 유목민 목자다. 겨울에는 가축을 이끌고 따뜻한 평원으로 이동하며 봄과 여름에는 고지대의 목초지로 이동한다.
일자리가 없는 샤위야인들에게 유럽으로의 이민은 한때 선택이 가능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지난 20세기 후반에 있었던 이민규제들로 인해 더 이상 선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수십만의 이민자들이 프랑스에 큰 샤위야 공동체를 남겨놓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군인이 된다거나 프랑스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프랑스로 가는 길이었다.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에 남게 됐다. 또 다른 사람들은 2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 노동력이 부족할 때 프랑스에 왔다. 최근에는 상인으로 프랑스에 왔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의 가장 중요한 무역상대국의 하나가 됐기 때문이다.
프랑스 이민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주택문제, 실업문제들을 포함해 인종차별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문제들이 생겼다. 처음 이민자들은 주로 남성들로서 낮은 수준의 호스텔에서 살았고 건설노동자, 거리청소부, 광부, 또는 철강회사의 노동자로서 낮은 급료를 받는 일을 하며 살았다. 1974년 경제적 압박의 시작과 함께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 직업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정부는 이민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신앙
샤위야인은 이슬람을 새로운 종교로 받아들였지만 이슬람 이전의 그들만의 문화적 의식적인 전통들을 지켜오고 있다. 이슬람의 수용과 아랍식의 방법들을 채택했지만 결코 완전히 그들만의 베르베르 문화를 없애지는 못했다. 명목상 그들은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대부분은 코란의 관습이나 중동 이슬람의 다른 요소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고 있지 못하다.
샤위야 사회는 이슬람과 부족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다. 그러나 도시와 시골 공동체 간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도시지역에서는 정통파 이슬람이 우세한 반면 시골사회에는 고대 신앙과 관습들이 이슬람 신앙과 혼합돼 있다.
필요로 하는 것들
8세기경 아랍의 침략으로 베라베르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다. 그전에 그들의 많은 수는 기독교인이다. 알제리와 모로코의 사람들에겐 기독교를 따를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지만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지만 아직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수는 계속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베라베르인들은 경제적 밑바닥에 있고 인종 편견을 당하고 있다. 기독교인 사역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관용을 프랑스의 베라베르인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필요하다.
09.12.2020